"드디어 왔구나(你终于来了)。 어딘지 알아. 지금 갈게." 아이비에커의 전화였다. 아이비에커의 전화를 받은 나의 얼굴은 만면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주 간단한 대화에서 쓴 표현 '드디어(终于)'가 다정하게 느껴졌다. 옛 친구가 내가 어딘 줄 얘기하자마자 자기 일정 다 때려치우고 온다니... 설렘과 반가움, 기쁨이 교차했다. 히바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내가 웃어본 적이 있었던가. 말도 안 되는 설렘에 나도 당황스러웠다.
아이비에커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우즈베키스탄 국립 예술 박물관(O'zbekiston Davlat Sa'nat Muzeyi) 5층에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우즈베키스탄 여행을 다 하고 나서, 바로 다시 본 목적지인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갔어야 했지만, 엄마의 기침이 잦아들지 않은 상태에서 또 한 번의 육로 국경이동은 무리였다. 우리는 엄마의 건강을 고려해서 7일간 타슈켄트에 머물기로 했다.
타슈켄트는 소련시대 급격하게 발전하고, 1966년 대지진으로 유적들이 한번 무너졌다 다시 세워진 만큼 사마르칸트에 비하면 도시가 고풍스럽지 않고 다소 각박한 모습이었다. 내가 서울 살아서 그런지 도시의 높은 빌딩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타슈켄트에서의 남은 7일간 나는 엄마를 혼자 호텔에서 최대한 쉴 수 있도록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원이와 외출해 드리는 게 유일한 목표였다.
타슈켄트 기차박물관
타슈켄트 기차박물관
7일의 첫날 나는 타슈켄트에서 주원이와 갈 만한 장소를 찾다가, 기차 마니아 주원이를 위해 타슈켄트 기차역 바로 앞에 있는 기차 기술 박물관(Temir yo'l texnikasi muzeyi)으로 향했다. 입구부터 검은색 증기기관차가 니스칠로 반짝반짝 빛나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하도 관광객이 없어서 그런지 매표소에 사람이 비어있었다. 우리가 구경한 지 10여분은 되었을 때 어떤 아주머니가 매표소로 천천히 들어가더니 어린이는 공짜라며 성인입장료 20000 솜(한국돈 약 2000원)을 징수했다. 7명쯤 되는 일꾼들은 기차기술박물관을 유지보수하는지 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공사 중이었는데, 12시쯤이 되자 매표소 앞으로 집결하더니 관광객이 쉬는 지붕 아래서 다 같이 바닥에 앉아, 볶음밥(Osh)을 먹기 시작했다. 이곳은 기차 박물관답게 기차가 정말 많았다. 파란 기차, 초록기차, 검은 기차.... 정말 모두 언젠가는 운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진짜 기차였다. 공원이 길쭉한 것으로 보아, 이곳은 기차 박물관이기 이전에 아마 기차와 관련된 부지였으리라.
기차박물관은 부지가 길쭉하다.
기차는 많기는 한데, 이곳은 박물관이라기보다는 기차창고에 더 가까워 보였다. 기차를 활용한 체험시설은 전무했고, 각 기차 앞에 그 어떤 설명도 없었다. 꼬마들은 1~2개의 기차에만 올라타볼 수 있을 뿐 밖에서 그저 관람해야 했다. 날씨도 더운데 그늘도 없이 모든 기차가 땡볕에서 거의 일렬로 전시되어 있었다. 주원이도 처음에 기차를 보고서는 신나 했지만, 기차 개수만 많을 뿐이지 동일한 기차들이 반복전시되어 있어, 들여다볼 포인트가 적었다. 본 지 10분도 안 되었을 때 아무래도 더 이상 기차박물관 끝까지 가볼 필요가 없어 보였다. 매점이 있거나 기념품샵이 있으면 뭐라도 샀을 텐데 그마저도 없었다. 기차창고냄새가 나는 기차박물관에서 나는 입장료값 20000 숨을 본전 뽑겠다고, 매표소 바로 뒤 앉을 수 있는 기차 안에서 다음 목적지를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았다.
국립예술박물관
국립예술박물관(구글맵에서 발췌)
나는 유아차를 끌고, 에어컨이 나올 것으로 추측되는 국립예술박물관으로 향했다. 타슈켄트는 더웠지만, 가는 길에 가로수가 그늘막을 형성해주어 더운지 모르고 유아차를 밀 수 있었다. 국립예술박물관의 복도는 아주 깔끔했지만, 4층짜리 건물에 그 흔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올라갔다 내려오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나는 한 손으로는 주원이를 잡고, 또 다른 한 손으로는 유아차와 각종짐을 들고 1층에서 4층까지 계단을 낑낑대며 올라갔다. 시원한 에어컨 공기를 기대하며 4층에 도착했건만, 여전히 공기는 환기가 안 된 미지근함이 돌았다. 에어컨을 사랑하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이 더운 날 에어컨을 안 켰을 리가... 작품전시 방마다 에어컨이 실제로 있었고, 손을 대어보니 실제로 작동도 하고 있었지만, 온풍인지 냉풍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의 바람이 에어컨에서 나오고 있었다.
국립예술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컬렉션은 정말 방대했다. 러시아, 소비에트, 우즈베키스탄 작품과 아시아 및 서양 미술을 모두 전시하느라고 방과 복도에는 전시품으로 가득 차있었다. 우리나라학자 이돈흥 선생의 서예작품, 전통혼례 한복 인형까지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세계의 명화들을 한자리에 모두 모아놓은 느낌이었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까지 있는 거 보면 가품과 진품이 한데 섞여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어느 그림이 진품인지 가품인지 따지지 않고 본다면 모든 방들의 전시가 방대한 컬렉션이어서 흥미로웠다.
주원이가 지루한 박물관에서 장시간으로 버티기 위해, 나는 주원이에게 그림 설명을 해달라고 했고 주원이는 꽤 오랜 시간 나를 위해 그림을 설명해 줬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가품 앞에서는 주원이가 이렇게 말해줬다. "어떤 빨간 옷을 입은 아저씨가 배가 고파서 식탁에 앉았어. 친구들도 배가 고파서 같이 먹으러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