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잤던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는 모든 시설은 호텔급인데 식사를 조리할 수 있는 주방용품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요플레와 도넛으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6시 30분 출발했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30분 정도 걸어 부르고스 시내를 빠져나왔다. 시내 끝 무렵에 부르고스 대학이 있었는데 외관상으로는 단과 대학 정도로 보인다.
오늘부터는 평균 해발 800m의 메세타 고원이 시작된다. 이고원은 부르고스에서 레온에 이르는 200km의 거리다. 전체 까미노 중 가장 힘든 코스라서 점프를 하는 사람도 많다. 우린 온전히 순례길을 걷고 싶어서 그대로 걸을 예정이다. 아침도 먹지 못하고 계속해서 걷는 건 힘이 많이 들었다. 지인이 한국에서 출발할 때 힘들면 먹으라고 준 홍삼 말린 것이 생각났다. 얼른 배낭에서 꺼내 입에 넣었다. 체력을 생각해서 한참 동안 우물거렸더니 맛도 부드러워졌다. 홍삼을 먹고 나니 요기도 되고 힘이 솟는 것 같다.
첫 마을에 마리아 성당이 보인다. 오래된 작은 성당이다. 기적의 패 목걸이를 걸어 준다는 그곳인지 유심히 보고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오라고 안내를 해 주었다.
“아~ 맞아, 이곳이었구나?”
석 달 전에 먼저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온 성당 교우 부부로부터 이곳에 관해 들었다. 우리가 이 길을 올 수 있도록 조언해 주고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게다가 두 사람이 메고 다녀온 배낭과 정보 등을 제공해 준 고마운 부부다. 지인의 도움이 있었기에 용기를 갖고 순례를 오게 되었다. 마리아 성당에서 기적의 패 목걸이를 선물로 걸어 준다. 흑인 신부님께서 안수를 해 주어 인상적이었다.
길은 굽이굽이 이어진다. 지평선과 하늘이 마주 닿아 있다. 밀을 벤 누런 들판과 파란 하늘 그리고 길이다. 메세타 고원의 장대함은 걸어도 걸어도 들판과 파란 하늘만 보인다. 고원 가운데로 난 길에는 순례자들의 발걸음 소리와 스틱 소리가 때로 행진곡처럼 들려온다. 그러다가 점점 소리도 잦아든다. 소리마저 아득해진다. 쏟아지는 따가운 태양과 더위가 온몸을 엄습한다. 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다들 말이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처럼 긴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지금 왜 이곳 스페인 까미노 길 위에 서 있는가?
나를 이곳으로 초대하고 이끌어 준 이는 누구인가?
나는 대체 무엇을 얻고자 이곳을 걷고 있는가?
문득, 끊임없는 질문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길이 언제 끝날 것인지 멀미가 나려고 한다. 오늘따라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무심히 떠간다. 다들 지쳐서 말이 없고 입술은 바싹바싹 마른다. 길을 걷는다. 지평선과 맞닿은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밖으로 향하던 마음이 각자 자신 내면에 머무는 것일까? 몸과 마음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일까? 아무런 생각과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현식이 별빛이 아름답고 소수 인원만 묵을 수 있다는 산볼 알베르게에서 묵는다고 헤어졌다. 현식을 보내고 온타나스 마을이 어느 정도 가면 나올 줄 알았는데 가도 가도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길은 사람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나 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이 멀리 보이는데 점처럼 보인다. 우린 그 점을 향해 걷고 걸어서 다가가 보지만 자꾸만 멀어진다. 마치 신기루 같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거의 능선이 끝나갈 무렵이다. 아래로 기울어진 내리막 움푹 들어간 그곳에 뭔가 보였다. 보물처럼 온타나스 마을이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반갑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마을 등장에 가슴이 뭉클할 만큼 반가웠다.
바로 인근에 바까지 있는 알베르게에 숙소를 배정받았다. 주방과 세탁 그리고 씻는 곳과 화장실도 있었다. 그런데 숙소서 일행이 베드 버그에 물려 고생할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31km를 메세타 고원을 걷고 나니 온몸이 파김치가 된 것 같다. 힘들지만 빨래 후 바에서 저녁 식사로 빠에야를 먹었는데 맛이 괜찮았다. 오늘 걷는 게 힘들었는지 계속 맥주가 당겼다. 메세타 고원을 지나오느라 타들어 갔던 목마름이 이어지는 듯했다. 몸이 시원한 음료를 원했다. 기분이 좋아 이런저런 말을 하는데 미카엘이 자꾸 눈치를 준다.
너무 힘들어서 쉬려고 들어가려는데 미카엘이 붙잡는다.
“무슨 맥주를 그렇게 많이 마셔! 뭔 말이 그렇게 많은 거야?”
하며 아이에게 꾸중하듯 말한다.
“ 여기까지 와서 당신 잔소리를 들어야겠어? 제발, 나를 그냥 좀 내버려 둬!”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놔두면 좋을 텐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좀 과하긴 해도 이 정도는 이해해 주길 바랐다. 우리 부부는 천주교 신자다. M.E 메리지 엔카운터 즉 <부부의사소통 > 프로그램 봉사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막상 현실에서는 소통이 되지 않아서 다툼을 하게 된다.
오늘은 힘들어 미카엘의 잔소리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미안해'라고 수긍하고 사과하기보다
“당신 정말 잔소리를 너무 하는 것 아니야? 자꾸 갈증이 나니 어쩔 수 없이 마시게 된 거라고!,
그것도 이해를 못 해?”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미카엘은 혀를 끌끌 찼다. 미카엘에게 조금은 미안했지만, 그냥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에 후회했다. 서로 어긋나서 다투는 모습은 누가 봐도 좋은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보, 미안해~ 너무 과했나 봐,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좀 봐줘라~
걷느라 너무 힘들었잖아. 담부터는 조심할게,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