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행과 어제 남은 닭죽을 데워서 먹고 6시 30분 출발했다. 처음엔 아스팔트 길이라 정말 빨리 걸어 시속 5.5km 속도로 걸었다. 네팔의 히말라야를 다녀왔다는 현식이 앞장서 걷고, 우리는 그 뒤를 쫓아가느라 정신없이 걸었다. 신작로 길로 들어서며 차츰 5km 속도를 유지했다. 그러다 끝날쯤에는 4.3km 시속으로 걸어서 도착했다. 마을을 제외하고는 거의 도로 옆 플라타너스의 외길로 쭉 이어진 길이다.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나 바를 열지 않아 삶은 달걀과 사과를 먹었다.
산티아고 프랑스 순례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다른 길도 있어서 정보에 밝은 일행을 따라 그 길을 찾아서 가고 있다. 오늘도 우리 같았으면 기존 길로 갔을 것이다. 일행 덕분에 중간쯤 와서 신라면을 파는 바가 있는 엘부르고 라네로 마을로 가려고 한다. 까미노 길도 가끔은 이렇게 변형을 주어 활력을 얻을 필요가 있음을 알았다.외길로 이어지는 길은 길었다.
일행은 오늘따라 유난히 빠른 속도로 걸었다. 난 네 번째로 걸었는데 자꾸 거리가 벌어졌다. 이렇게 쳐지기 시작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걸었다. 그래도 남자들보다 보폭이 좁은 내 걸음으로는 도저히 따라가기가 힘들다.순례길에서의생활은 단조롭다. 먹고 걷고 자는 것이 전부다. 그래서 그런지 먹는 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약간은 집착하게 된다. 작은 것도 크게생각되고기쁨이 된다.
지난번 부르고스에 있는 중국 뷔페 음식점 웍에 가서 점심 먹자고 할 때가 생각난다. 어찌나 빠른 속도로 걷는지, 역시 먹는 걸 생각하며 걸을 땐,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빨리 걷는다는 것을 전에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나도 라면을 먹을 생각에 자꾸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데도 따라가지 못할 때는 뛰어서 거리를 좁혔다. 거리가 벌어질 때마다 열 번은 그랬는데 미카엘은 그때마다 뒤에서 호흡을 맞추어 주었다.드디어 엘부르고 라네로 마을이 보이고 신라면 파는 바로 왔다. 간판에 신라면 3.5유로 햇반 4.0유로라고 한국말로 적혀 있었다.
외국에 가면 모두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한글로 쓴 글씨만 봐도 반가웠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한국 라면을 판다고, 우리가 그것을 찾아 줄기차게 열심히 달려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얼마나 발걸음 가볍게 걸어왔는지 신기하다.
“우리 진짜 빨리 왔네, 이 힘은 대체 뭐지?‘
우리는 햇반까지 하면 가격이 너무 비싸 신라면만 시키기로 했다.
기다란 접시에 먹음직스러웠다. 납작한 접시에 라면 국물은 별로 없는 하나의 훌륭한 요리 같았다. 지인에게 사진을 보냈는데 한국에서 파는 라면보다 맛있어 보인다고 해서 웃었다. 정말 그랬다. 삶은 달걀을 썰고 버섯을 삶아, 고명으로 얹어 보기 좋게 내놓았다. 오랜만에 살짝이라도 라면 국물을 먹으니 살 것 같다. 역시 한국인은 얼큰한 걸 먹어야 하나 보다. 맛난 라면을 먹고 마을을 벗어나 도로 옆 플라타너스 사이의 오솔길을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플라타너스 사이로 이어진 길은 도로 옆으로 쭉쭉 이어졌다. 오솔길이라서 두 명이 걷기도 비좁아한 명씩 걷는다. 앞으로 걷는 스틱 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다. 그래도 나무가 심겨 있어 그늘의 덕을 톡톡히 본다. 그늘이 있어 시원하고 마음도 안정된다. 나무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이곳은 아직 메세타 고원이고 900M가 넘는 고지란다. 멀리 보이는 곳에 나무들이 무성하다. 역시 물이 중간에 흐르고 있었다.
수로 사이은사시나무가 쭉쭉 뻗어 있다. 녹색의 나무들을 바라보는것으로 눈이 호강하고 마음이 정화되는 듯하다. 큰 냇가 다리를 건너자 알이 굵은 산딸기가 있어 따먹었더니 달고 맛있다. 우리는 각자 딸기를 따 먹으며 전에 먹었던 것보다 크고 맛있다며 깨알 같은 수다를 떨었다. 순례하는 힘든 여정에 산딸기는 우리에게 특별히 주는 선물 같았다. 상큼한 산딸기를 따 먹으며 잠시 고됨과 힘듦을 잊었다.
마을은 아직 멀었다. 보이는 곳 끝까지 걸어가면 나오려나 하면 다시 길이 이어진다. '저 길 끝까지 돌아가면 마을이 보이겠지.' 하고 걸어가면 어김없이 또 길은 이어진다. 이렇게 몇 번을 속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빠져 기진맥진하다.
그래도 이럴 때는 먹는 얘기를 하면 잠시 그 기억에 힘이 솟는다.나는 청주서 걸을 때 먹었던 비빔 막국수를 얘기했다.막국수에 얼음 동동 띄운 육수를 먹을 때 시원했던 맛이 제일 생각난다. 다른 사람은 매콤한 닭갈비도 이야기하고 시원한 물냉면을 이야기한다. 또 김밥 떡볶이를 말할 때 그냥 듣고 상상하는 것으로도 충족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목이 타는 갈증을 첫 번째 바가 나오는 곳에서 생맥주를 함께 마시는 것으로 정했다. 역시 덥고 힘들 땐 맥주가 최고다. 맥주는 순례길에 빠져서는 안 되는 절대 기호식품이다. 한잔 마시는 순간 지치고 힘들었던 고단함이 맥주 거품처럼 홀연히 사라진다.우린 약속했던 것처럼 첫 번째 바에 들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웃는 모습을 보며 흡족해서 공립 무니시팔로 향했다. 어렵지 않게 찾았다.
우리가 도착하자 접수 관리인이 “꼬레아?”하며 “피곤해” 그러면서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벽에다 한국 지폐를 붙여 놓고, 태극기도 걸어놓아 신기했다. 그동안 한국 사람들이 순례길에 얼마나 많이 다녀갔는지 짐작이 간다. 오늘은 정말 피곤해 쉬고 싶은데 미카엘은 장을 보러 가자고 한다.
한참을 걸어 동네 조그만 슈퍼에 가서 감자, 양파, 복숭아, 달걀 등 여러 가지를 사서 들고 오는데 꽤 무거웠다. 여럿이 함께 먹어야 하니 양도 많았다. 같이 다니면 좋은 점도 있는 반면에 힘든 점도 있다. 나중에 돼지고기도 사 왔다. 우리는 주방으로 가서 야채 볶음에 라면 수프를 넣어 볶음밥을 했다. 어우러져 맛을 낸 볶음밥처럼 우리도 함께 어울려 맛있게 저녁 식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