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유심칩 때문에 둘째 딸에게 부탁해 놓은 게 있어 카톡을 확인해보니 통화부터 하고 싶다는 문자가왔다.우린 유심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어 순례 전에 고심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유심칩 두 개를 인터넷으로 신청하고 당일 공항에서 받았다. 사용 기간이 수령일 기준 25일이다. 레온에서 어제 유심칩을 구매할까 했는데, 주일이라 상점 문을 닫았다. 어쩔 수 없이 전에 사용하던 것에다 충전을 하기로 했다.
일행 중태희는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가서치료받고 쉬었다가 버스를 타고 온다고 했다. 원일은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겨 가렵다고 한다. 어제부터 가렵다고는 했어도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는데 걱정이다. 어제 웍에서 먹은 해산물이 문제인지, 베드 버그의 문제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태희는 알베르게에 남고 넷은 6시 40분 출발했다.우리는 무니시팔에서 제공하는부실한 빵과 커피를 마시고 길을 나섰다.
레온 옆 마을 트로바 조 델 까미노에 들어서니, 언덕에 굴을 파고 문을 닫아놓은 보데가 (와인과 식료품 보관 저장소)가 여러 개 보인다. 이곳에 포도주, 하몽, 초리소 등을 보관했다고 한다. 12km 지점 Valverde de la Virgen에서 오렌지와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좀 특이한 마그넷을 사고 잠깐 쉬었다. 이후 일직선으로 쭉 이어진 길을 걸어왔다. 옆으로는 도로가 있었는데 화물차가 많이 오고 갔다.가다가 보니 등산화로 노란 표시를 해 놓은것이 눈에 띈다.
현식과 원일은 먼저 앞서가고 우리는 편안한 마음으로 걸으며 오늘 저녁 메뉴에 관해 얘기했다. 미카엘이 돼지고기 찌개를 하는 게 좋겠다고 얘기해 나도 좋다고 했다. 감자와 양파 돼지고기 그리고 라면 수프를 넣고 빠글빠글 끓이면 맛있는 찌개가 될 것이다. 순례길 저녁 단골 메뉴인데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21km 지점 빠라모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했으나 바가 없어 그냥 벤치에 앉아 쉬었다. 원일이가 에너지바를 하나씩 줘서 먹었다. 원일은 잠깐 병원에서 처방전을 받아와 약국에서 약을 샀다. 베드 버그에 물린 거라고 한다. 우린 아직 이상이 없는데 일행이 가렵다고 하니 신경이 쓰인다. 다시 길을 걸어 우리가 머물 산마르틴에 있는 숙소에 갔는데 미리 온 현식과 원일이 앉아 있다.생맥주와 오징어 튀김, 닭튀김을 시켰다고 했다. 원일은남은 일정이 빠듯해 한코스를 더 가야 해먼저 인사하고 갔다.
우리도 같은 메뉴로 시켜 먹고 나서 알베르게 접수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2층밖에 없고 1층은 10유로라고 해서 인근의 다른 무니시팔로 옮겼다. 이곳은 28명이 묵는 곳인데 텅 비어있어서 이곳에서 묵기로 하고 짐을 풀었다.
한국인 대학생 영현이 세계여행 중에 산티아고 순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알베르게로 옮겨 같은 룸을 쓰게 되어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아직 대학생인데 벌써 35개국을 다녔다고 하는데 더 다닐 거라고 하니 포부가 크다. 공장 아르바이트해서1,600만 원을 모아 세계여행 중이라며 돈이 부족해 아버지께 빌렸다고 했다. 웬만한 대학생 같으면 그냥 달라고 했을 텐데, 빌렸다는 말에 대견하고 기특하다.머리는 길고 마른 데다 까맣게 타서 말을 하기 전까지는 한국인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한 학기를 남겨두고 나름대로 뜻이 있어 세계여행을 하는 거라고 한다. 앞으로큰 꿈을 갖고 폭풍 성장을 할 거라 믿는다.
알베르게 관리인이 저녁 식사 준비를 한다고 혼자 분주하시다. 70대 가까이 되시고 배는 불룩하신 남자분이 정성스럽게 식사 준비를 하는 모습이 진지하기까지 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6명을 위한 저녁 만찬이었다
"미카엘, 저분들은 아까 부엌에서 종종걸음 치며 음식을 만들던 저 아저씨의 모습을 알까?" 하고 옆에 있는 미카엘에게 말했다. 남편은 그냥 웃기만 했다.
맛있게 먹는 분들을 바라보는 아저씨의 모습이 흐뭇해 보인다. 역시 요리하는 사람의 가장 큰 보람은 맛있게 먹어주는 대상을 바라보는 것일 게다.
우리 저녁은 햄과 감자 양파에 라면 수프를 넣어 끓였다. 얼큰한 국물에 감자를 넣어 영양도 풍부하다. 이곳에서 라면수프는 신비의 묘약인가 보다. 거의 맨날 먹어도 질리지 않고 정말 맛있다. 오늘따라밥도 잘 되었다. 고추 초절임까지 곁들여져현식과 더욱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고 잘 마른빨래를 걷어다 개서 분류해 놓았다. 오늘은 모든 게 여유가 있어 기분이 좋다. 저녁을 먹고 남편과 마을을 산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