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류 채남식 시인은 청주 출생으로 참여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청주 시립 정보 도서관 시울림 문학회 회원이다. 수류 시인은 시집에 실린 시가 지난 몇 년 동안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본 글이라고 했다. 낯설지 않은 쉬운 말들로 쓰고 싶었지만 곱지 않고, 앞 뒤가 고르지 못한 곳이 많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나름의 고집으로 저자 딴에는 심신을 다한 글이니 한 줄이라도 읽어주면 감사할 따름이라고 인사한다. 시를 읽지 않아도 세상에 변할 것 하나 없지만
읽어 주신다면 저의 세상이 변할 것이라고
시집 머리글에 쓰고 있다.
흔적
빛의 반사와 굴절이 색을 빚는다
떠오른 시상이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가 쓰일 것 같았으나
막상 한 줄 써놓고 보니 그저 평범한
남들 하는 짓거리 나도 하면서
한 발작도 사람 사는 일에서 벗어난 적 없는
남들처럼 웃고 울고 살아온
내 인생에 심각할 게 없다
지구 상엔 사람 수보다 더 많은 모래알이 있고
우주엔 그 모래알보다 몇 배나 많은 별이 있단다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찾는다는 것
하찮고 부질없는 일
나는 겨우 70을 다 못살았어도 이미
인간의 나이로는 많이 늙었다
싫어도 가야 할, 정해진 길을 가고 보면
눈여겨보지 않으면 뵈지도 않을 속옷에 번진
작은 얼룩만도 못한 흔적일 뿐이지만
이 한 세상 살아볼 수 있었다는 것
나는 행복했고 외톨이라도 행복하다
사흘은 더 살고 싶다
내 아내는 나보다
사흘만 더 살고 싶단다
내 장례는 자기 손으로 치르고
평생을 함께 한 사람
애간장 끊어가며
슬피 울어보고 싶단다
자기가 먼저 죽는다고
내 마음이
흐트러지지는 않을 것을 믿지만
어느 한구석에라도
외로움 끝에 망령스럽게
다른 이의 그림자가 스미는 것도 싫단다
지금부터는 내가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까지
나의 단 하나 사랑이고 싶단다
그 나이에도 꼭두서니 물든 얼굴을 하고
부디 아프지 말고, 안녕히
13년을 하루같이
멀리 가는 내 발이 되어 주었던 너
때맞춰 심장 마사지 기름 갈아주고
어쩌다 새 신발 신겨주고
밥 넉넉히 담아주면 잔병치레 한번 없이
넌 그저 좋아라 어디든 가자고 등을 디밀었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고 널
내쫓을 궁리를 하고 있어도 앙탈을 부리지 않고
새 식구 선보러 다니는 날에도 넌
묵묵히 내 발이 되어 주었지
항상 고맙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난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해줬구나
중고차 수출회사 직원이 널 데리러 왔을 때도
미안하다 난 여염 한 새 식구 맞느라 즐거워서
건성으로 손을 흔들었을 뿐
흐느끼는 네게 작별인사조차 제대로 못 했구나
잘 가라 네 가는 곳 어느 먼 나라라도
좋은 주인 만나 부디 오래도록, 아프지 말고,
어머니의 수제비
전쟁이 끝나고 너나없이 어렵던 시절
포대(布袋)에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구호품 밀가루
그걸로 어머니는 수제비를 자주 해주셨다
반죽을 힘들게 치대야 하고 홍두깨로 밀고
썰어야 하는 칼국수보다 만들기 쉬웠기 때문이다
멸치 우려낸 물에 대파 숭숭 썰어 넣고
감자 얇게 빚어 넣은 뒤
밀가루 반죽 묽게 해서 주걱으로 떠서는
놋젓가락으로 쳐내듯 수제비를 뜨셨다
수제비 두께가 똑 고르고 얇아서
골고루 잘 익고 쫄깃하니 맛이 좋았다
어쩌다 수제비 해 먹자고 하면 마누란
약간 되게 반죽한 밀가루를
손으로 조물조물해서 뜯어 넣는다
두께가 고르지 않아 두꺼운 곳은 잘 안 익어
꺽꺽하고 맛이 없다고
어머니처럼 젓가락으로 얇게 빚 어보라 투정했더니
아예 수제비가 밥상에 오르지 않는다
괜한 소리를 했나 봐요 어머니
시가 있는 곳
구름 떠가는 하늘에도
시 한 구절 걸려있을 수 있고
냄새 질척한 시궁창 속이나
메마른 모래밭에도
한 잎 달랑 남아 실바람에 팔랑이는 갈잎에도
수많은 시의 사연이
당신이 찾아 줄 때를 기다리고 있지요
세월의 강물엔 더 많은 시어(詩魚)들이
손맛을 유혹하기도 하지요
외로울 때 잡아보는 당신의 손
남루한 영혼 속에도
시가 떠날 줄 모르는 건
삶이 고통스러워도 소중하기 때문이라지요
시는 어디에나 있어도
마음의 눈에나 보이는 것
마음을 열지 않는 자에겐 보이지 않는 것
당신의 시심에 불을 댕겨보지 않으실래요.
산다는 것
사람 사는 세상엔
하고많은 길이 얽히고설켜서
한번 엇갈리게 되면
언제 다시 만날까 기약하기 어렵더라
가다가다, 어디 고부라진 길 건너다
우연히 마주칠 수 있겠지만
모른 체 스쳐 지나가고 말 수도 있지
언제까지나 함께 가겠다고 약속한 사람도
어느 순간에 헤어질지 모르는 일
그렇다고 인연이 그뿐이라고
운명 탓, 숙명 탓으로 돌리고 말 텐가
스쳐 가는 인연들을
소중히, 아름답게 가꿔 가노라면
삶이 더욱 윤택해지지 않을까
산다는 것
나와 스쳐 가는 사람들과 팥고물처럼
함께 묻혀 길을 가는 것이 아닐까
시인의 아호는 수류이다. 흐른다는 것은 만고풍상을 다 겪은 후에나 가능하다.
월남전 참전 후 돌아온 시인은 디스크, 천식, 축농증, 백내장, 관절염, 치질, 피부병, 위장병, 그리고 편평 세포암에 이르러 전립선암 3기로 고엽제 후유증, 그런 고통 속의 삶을 사시는 분이다. 게다가 사랑하는 자녀를 저세상을 보낸 아비이기도 하다. 수심이 드리울 만도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를 쓰고 시를 낭독한다. 매주 도서관 근처 공원에서 네 잎 클로버를 무더기로 가져와 시창작반 회원들에게 행운을 나눠 주셨던 정 많은 분으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