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던 작가,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님의 10주기를 기념하여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이웃같이 소박한 모습의 작가는 2011년 1월에 담낭암으로 타계까지 쉼 없이 작품 활동을 하였다. 40여 년간 80여 편의 단편과 15편의 단편 소설을 포함하여 동화, 산문집, 콩트집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을 남겼다. 대중 인기 작가이면서 문학성도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 박완서 작가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내면의 은밀한 갈등을 짚어내고, 중산층의 호위 의식과 여성 평등의 사회 문제를 특유의 신랄함으로 드러 내기도 했다. 박완서 작가는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나 숙명 여고를 거쳐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6.25 사변으로 중퇴하였다. 1953년 결혼하여 1남 4녀를 두었고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작가는 능란한 이야기꾼으로 구도자의 길을 꾸준하게 걸어왔다고 평가된다. 일상적 삶을 중년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현실적 감각으로 희망과 사랑을 그려냈다. 작품 세계는 지극히 인간적이었던 작가의 삶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호원숙 자녀는 박완서 작가가 생전에 쓴 660여 편의 에세이 중에 35편을 엄선해서 이 책의 내용을 구성하였다. 추린 글들을 다시 보면서 고인이 되신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그동안 어머니로서 가족들에게 사랑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세상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젊은이들이 밝고 자유롭게 미래를 펼쳐가기를 얼마나 원했는지, 하찮은 것에서 길어 올린 빛나는 진실을 알려 주려고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게다가 생의 기쁨과 아름다움에 얼마나 절절하게 마음이 벅찼는지, 그러면서도 어머니 자신에게는 얼마나 정직하고 엄격했던지 그 담금질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고 했다. 세상을 떠나신 지 10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정수리를 지그시 눌러주는 박완서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어머니가 마당에 심으신 키가 큰 만추 국의 그윽한 향기가 그윽한 그리움처럼 사무친다고 적었다.
박완서는 산골마을로 가서 살게 된다. 외출을 삼가고 책을 볼 시간이 많아지면서 밀린 원고 빚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불편한 상황을 감수하고도 골짜기로 이사 온 것은 산 때문이었다. 아차산이 있어 청청해 보이고 마음에 들었다. 사람이 안 다니는 길로 자주 등산을 다녔고 갈 때마다 설렐 정도로 좋았다. 정초에 친정어머니께 세배를 갔다가 대소가가 한자리에 모이게 됐다. 잡담과 화투 놀이와 티브 보는 것 중에 잡담 패거리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미담보다는 악담에 더 열정적이었다. 이때 팔십 노모께서 그런 못된 사람들을 안 겪어 봤다고 말씀을 하셨다. 팔십 평생을 회고하며 자신 있게 말씀을 하셨듯이 세상엔 믿을만한 게 훨씬 더 많다. 그날 귀갓길에 폭설이 녹지 않고 얼어붙어 몹시 위태로웠다. 그런 거리를 늦은 밤 택시로 가는 기분은 아슬아슬했다. 운전기사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불안한 마음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교감은 책임감을 만들었고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고 한다. 봄을 믿을 수 있는 건 하늘 섭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박완서 작가님이 부산 베네딕도 이해인 수녀원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88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을 때다. 당시에 모든 세상이 그대로 변함없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참을 수 없을 만큼 많이 힘들었다. 작가는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고 했다. 게다가 주변에서 동정하면서 잘해 주려고 애쓰는 것들은 더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마치 고약한 부스럼 딱지가 된 것처럼 비참했다고 회상했다. 자신이 불행을 핑계 삼아 횡포를 부렸음을 시인했다. 이때 이해인 수녀님으로부터 편히 쉴만한 방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수녀원 언덕 방 손님이 되었다. 그때 간절하게 가고 싶었던 게 신의 부르심이었다고 믿는다. 가족의 적당한 무관심에 숨통이 트였고 수녀님의 배려에 그래도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가끔 수녀원 언덕 방에서 아릿한 향수와 평화를 느꼈다. 자연과 접하며 기쁨과 평화를 만끽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박완서 작가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그런데 지인들과 어울려 노래방을 가게 되었다. 짓궂은 사람이 계속해서 노래를 강요해서 안부를 자유를 달라고 버럭 고함을 쳤다. 흥청거리던 분위기가 갑자기 서먹해지고 자신의 유치함에 오히려 치가 떨렸다고 한다. 그 생각만 하면 창피하고 혐오스러워 닭살이 돋을 것 같았다. 친구에게 하소연하니 노래까지 잘하면 어떡하느냐는 말에 노래만 빼고 잘할 수 있는 게 줄줄이 떠올랐다. 박완서 작가는 한때 참척을 당하고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며 원망스럽고 부끄러워졌다. 주변에서 수군거리며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두문불출했다. 원망과 치욕감으로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한다. 그때 서원 전이던 수녀님 말씀 한마디에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을 나에게만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된다고 여긴 게 교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고 회상했다.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의 글이다. 타관으로 출입이 잦았던 할아버지의 두루마기 자락에서 딴 고장의 바람 냄새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돌아오실 때 사탕을 사 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다 중풍으로 집안이 우울해졌다고 한다. 출입을 못하게 된 할아버지는 서당을 차렸는데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할아버지는 어린 박완서에게도 천자문을 외우게 했는데 영특하게 잘해서 만족해하셨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시어른을 설득해 박완서를 서울로 데려가 공부시키려다 심한 반대에 부딪친다. 그러나 어머니의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결국 서울로 가게 된다.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하셨고 신여성을 부르짖으며 한글과 일본 가나를 가르쳤다. 어머니도 신여성을 기대했지만 당시엔 팔자가 사납다는 인식이 있었다. 혹시 딸이 팔자가 사나울까 봐 두려워했던 모순을 두고 우습고 슬프다고 했다. 박완서 작가도 딸을 공부시키면서 평생토록 일을 하라고 가르쳤다.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고는 남녀평등이란 구호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뛰어난 이야기꾼이셨고 박완서 작가도 그 점을 닮았다. 어려서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면 졸라서 이야기를 듣곤 했다. 어머니가 이야기를 만병통치약처럼 들이댔던 건 이밖에 가진 게 없었다는 걸 안다. 박완서도 뛰어난 이야기꾼이길 원했다. 어머니가 그러던 것처럼 이야기의 효능을 믿고 싶다. 박완서는 꼭 한밤중에 뭔가 쓰고 싶어서 끄적이다 보면 남편은 낯에 쓰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러면 원고 뭉치를 치우게 된다. 그래도 늘 밤에 도둑질하듯 글쓰기를 즐겨왔다고 한다. 그러나 실용성이 없는 글쓰기에 자신감도 없고 쓰는 일도 읽히는 일도 부끄럽다고 했다. 소설을 읽었다는 분을 만나면 부끄럽다 못해 그 사람이 싫어지기까지 한다고 했으니 박완서 작가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아래 글은 책 내용 안에 실린 글이다. 지금 보면 박완서 작가님이 이런 생각을 하고 글을 썼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만일 내가 인기 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면, 온 세상이 부끄러워 밖에도 못 나갈 테니 딱한 일이지만 그렇게 될 리도 만무하니 또한 딱하다. 그러나 내소설이 당선되자 남편의 태도가 달라졌다. 여전히 밤중에 뭔가 쓰는 나를 보고 혀를 차는 대신 서재를 하나 마련해줘야겠다지 않는가, 나는 그만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서재에서 당당히 글을 쓰는 나는 정말 꼴불견일 것 같다. (책 내용 중에서 )
박완서 작가님은 아들이 교통사고로 부모보다 먼저 죽는 비통함의 고통을 겪게 된다. 1남 4녀 중 하나밖에 없던 귀한 아들이었다. 아들이 죽자 따라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베란다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으나 무서워하지 못했다. 짐승 같은 육체에 모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식욕에 굴복하게 말았다. 인간의 목숨이 얼마나 치사한 지 알게 되었다. 아직도 죽음은 희망이다. 아침나절이 고통스러웠고, 잠자리에 들 때는 아들과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흐뭇하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지만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을 죽은 아들의 마중을 받으면서 넘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우리 문학사에서 그 유례가 없을 만큼 풍요로운 언어의 보고를 쌓아 올리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고 평가된다.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기고 타계하신 모두의 어머니 박완서님의 안락한 영면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