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사는 집에 이사 온 지가 15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책장에 책을 계속해서 채워 넣기만 하였다. 학생들 논술수업하던 교재가 꽤 양이 많다. 그리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출판사하는 지인분이 여러 박스에 넣어 책을 보내오기도 했다. 선물 받은 책, 그리고 읽고 싶어 구입한 책으로 책장은 빼곡히 채워져 있어 '언젠가 정리를 해야지' 생각만 하고 미루어 두기를 몇 차례 거듭했다. 그러다가 이번엔 큰 마음먹고 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 책 속에 담긴 추억이나 지식 그리고 다양한 내용을 생각한다면 그것을 버린다는 게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책장에 고이 모셔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끌어안고 살아갈까?'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큰 맘을 먹고 정리를 하기로 했다. 우선은 오래되고 낡은 책들, 앞으로 다시 안 볼 것 같은 책들은 과감히 처분하기로 했다. 책장을 비우는 일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략 2,300여 권의 책 앞에서 나는 '어떤 책을 두고 어떤 책을 버려야 할까?' 고심이 깊어지는 시간이 되었다. 수많은 책 앞에서 난 분류자가 아니라 선별자가 되었다. 그래서 최종 선별된 간직하고 싶은 책 200권은 안방 안쪽 서재로 옮겨서 책장에 정리했다. 그리고 손주들에게 줄 시리즈를 포함 100권의 책도 묶어 놓았고, 현재 돌봄 하는 아이에게 건넬 책 30권도 따로 빼놓았다. 책을 좋아한다면 더 주고 싶었는데 책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해서 최소한 주기로 했다.
책을 다 버리기는 아까워서 방법을 찾아 보았다. 그러다가 <아름다운 가게>에 넘겨주면 필요한 곳에 배분이 됨을 알게 되어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름다운 가게>로 기증할 400여권은 가져가기 쉽게 끈으로 반듯하게 묶어 놓았다. 아름다운 가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영리 공익 단체(사회적 기업 성격의 재단)로 물건의 재사용을 통해 나눔과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곳이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읽을만한 책들로 묶어 놓았다. 그야말로 폐지로 버릴 책 1600여 권은 바깥 화장실 안쪽에 쌓아 두었다. 폐휴지를 수집하는 곳으로 가져가면 Kg을 달아서 현금으로 준다고 했지만 그곳까지 가져가는 것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파트 분리수거하는 곳에다 가져다 놓기로 했다. 먼저 책장에 책을 빼서 분류하며 쌓아 놓았다. 책 무게가 무거워 들어 옮기는데도 남편은 버거워했고 진이 빠지는 듯했다. 내가 아이 돌봄을 간 이후에 휴무였던 남편은 꼬박 3시간을 책장과 방청소, 그리고 정리에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이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숫자로 적어놓으니 간단해 보이지만, 책 한 권 한 권에는 내가 살았던 시간이 접혀 있었을 것이다. 다시 볼 수 있는 책 200권은 ‘유용한 책’이라기보다 나를 잊지 않게 해주는 책들이다. 논술교사로 살며 아이들에게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읽었던 책들, 시인으로 건너오며 한 문장을 붙들고 밤을 새우게 했던 책들, 브런치 작가로 지내며 나의 일상을 언어로 정리하도록 도와준 책들. 이 책들은 아직도 나에게 말을 걸곤 한다. 그래서 나는 차마 버릴 수 없는 책들을 선별하여 안쪽 깊숙한 서재에 남겼다.
<아름다운 가게>란 쓰지 않는 물건을 기부받아 판매하고, 그 수익으로 이웃과 사회를 돕는 비영리 공익 단체이다. 도서, 의류, 생활용품, 잡화, 아이 물건. 미개봉 물품등 다양한 물건을 기부할 수 있다. 기준은 누군가 다시 사용해도 괜찮은 물건이면 가능하다. 생활하다 보면 사용하지 않는 물건 중에 쓸만한 물건들이 많다. 그런 것들을 당근으로 팔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를 하면 꼭 필요한 분들께 전달이 된다고 한다. 기부가 어려운 물품으로는 심하게 훼손된 물건이나 오래된 전자제품, 위생상 문제가 있는 물건, 낙서 찢김이 심한 책, 사용감이 너무 큰 속옷 등이다. 기부 방법은 직접 매장에 가져가거나 아름다운 가게 사이트나 전화로 안내를 받아서 기부할 수 있다. 수량이 많은 경우에 별도의 접수가 필요하고 집 문 앞에 놓으면 가져간다. 이번에 책도 문 앞에 놓으니 약속한 날 가져갔다. 30권씩 묶어서 가져가기 편하게 놓으면 된다. 아름다운 가게 판매 수익은 취약계층 지원, 아동 청소년, 어르신 돕기, 환경보호 활동, 지역사회 공익사업 등에 쓰인다고 한다. 책은 특히 지식과 이야기가 다시 순환이 되고 환경보호나 문화 나눔으로 확산되니 기분도 좋다. 내가 사용하던 물건이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돕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니 뿌듯하다. <아름다운 가게>로 기부는 물건의 재사용이 환경보호로 이어지고, 나눔을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으니 상부상조의 느낌이 들어 기분 좋다. 집안에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살펴보고 사용 가능한 물건은 기부에 동참해 보시길 권한다. 기부 후에 기부 영수증도 작성가능한데 세금감면 혜택이 주어진다. 다만 정보동의서를 제출해야 가능하다.
가장 많은 책 1,600여 권을 버리면서 나는 비로소 인정했다. 모든 책이 끝까지 함께 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모든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잘 보내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책장을 비우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늘 읽고, 쓰고, 가르치며 살아왔다. 이제는 쌓는 시기보다 정리하는 시기라는 것을. 책이 줄어든 자리에 조금 더 가벼워진 내가 남았다. 그리고 글을 쓸 수 있는 여백이 생겼다. 책장을 정리하는 일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책속에 켜켜이 쌓아 놓았던 시간들을 허물고 정리했으며 대신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책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날, 나는 내가 이렇게 오래 책과 함께 살아왔다는 걸 알았다. 2,300권 정리하는 책 앞에서 난 읽는 사람이 아니라 보내는 사람이 되었다. 요즘 예쁜 아이를 돌봄하고 있다. 돌봄의 자리는 누군가를 도와주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을수록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곳은 가르치는 자리도, 판단하는 자리도 아니라 함께 버티는 자리라는 것을. 하지만 돌봄의 현장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어제와 다르게 아픈 날, 말이 더 적어지는 날, 아무 이유 없이 짜증이 나는 날.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돌봄의 자리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답을 주기보다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 손을 내밀기보다 눈을 맞추는 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큰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것을 그곳에서 배웠다.
논술교사로 살던 시절, 아이들에게 생각을 정리하는 법을 가르쳤다. 시인으로 살며 문장을 다듬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돌봄의 자리에서 다시, 아무것도 다듬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정리되지 않은 말, 어수선한 감정, 반복되는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을 ‘고쳐야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사람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돌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돌봄은 특별한 말을 건네는 일이 아니라 평소의 태도를 유지하는 일에 가깝다. 어제와 같은 목소리로 인사하고, 같은 시간에 안부를 묻고,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는 것. 반복이 그 사람에게는 생각보다 큰 안정이 된다는 것도 그곳에서 배웠다. 이 일이 소모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하루와 함께 하는 일은 내 하루를 함부로 대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 쉽게 단정하지 않게 되었으며, 조금 더 천천히 걷게 되었다. 돌봄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존중하는 감각을 유지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삶의 다른 자리에서도 나를 지탱해 주고 있다. 돌봄의 자리는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어떤 태도로 사람 앞에 서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하는 자리였다. 그래서 오늘도 순수하고 맑고 예쁜 아이를 만나러 간다. 책장을 비워낸 자리에 이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더 다가갈 수 마음의 여유가 있길 소망해 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