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3천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은과 곡물을 기반으로 한 신용 거래가 제도화되었으며, 이자율 또한 일정한 관행에 따라 설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자율은 법정 고정률로만 유지된 것이 아니라, 실제 시장 상황에 따라 상당한 변동성을 나타냈으며, 이는 고대 경제의 구조적 특성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고고학적 및 문헌 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자율이 일반적으로 확인된다:
곡물 대출 이자율: 연 33⅓%
은 대출 이자율: 연 20%
이는 함무라비 법전에도 명시되어 있으며, 이후 기원전 2천년대까지 장기간 유지되었다. 이자율의 차이는 실물 자산의 보존성, 유통성, 가치 안정성에서 비롯되었다.
은은 부패하지 않고 저장이 용이한 반면,
보리는 부패 위험과 저장 비용이 높아 그에 비례한 고이율이 적용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은과 보리 간 환율이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 이자율(real interest rate)은 명목 이자율(nominal rate)과 차이를 보이곤 했다.
예시:
계약 시: 1 세겔 은 = 180 실라 보리
상환 시: 1 세겔 은 = 120 실라 보리 → 실질 상환 부담 증가
이러한 환율 변동은 시장 수급, 기후, 전쟁, 수송 경로의 안전성 등에 따라 달라졌으며, 채무자는 명목상 같은 금액을 갚더라도 실질적으로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질 수 있었다.
다음은 이자율 변동의 주요 구조적 요인들이다:
a. 기후와 농업 생산성
홍수, 가뭄, 해충 발생 등으로 인해 곡물 생산이 줄어들면, 곡물 이자율이 상승하거나 상환 자체가 지연되었다.
흉작의 경우, 채권자도 이자 수취가 어려워 담보 회수나 신체 노동 전환 등으로 대응하였다.
b. 정치 및 군사적 불안
도시국가 간 전쟁, 왕권 교체, 외적 침입 등은 곧 무역로의 단절과 물자 가격 급등으로 이어졌고, 이자율도 이에 따라 상승하였다.
반대로 국왕이 탕감령을 선포할 경우, 강제적으로 이자 수취가 중단되거나 원금마저 소멸되었다.
c. 신용 수요의 계절성
농업 사이클에 따라 파종기(봄)에 대출 수요가 급증하고, 추수기(가을)에 상환이 집중되었다.
이로 인해 파종기에는 곡물 이자율이 일시적으로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d. 화폐 가치의 상대적 변동
은의 유입량(예: 외부 무역, 전쟁 전리품)에 따라 은의 구매력이 하락하거나 상승함에 따라 이자율도 재조정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대체로 단리(simple interest)만 허용되었으며, 복리(compound interest)는 법적·종교적으로 제한되었다.
함무라비 법전이나 우르남무 법전 등에는 복리 금지 조항이 명시되지 않았지만, 실제 문서에는 복리 계산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관습적으로 제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과도한 채무 압박을 방지하고 사회적 혼란을 줄이기 위한 정치적 균형장치였다고 해석된다.
고대 군주들은 이자율을 직접 규제하지는 않았지만, 정기적인 채무 탕감령을 통해 금융 시스템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이신-이쉬타르 왕(기원전 1953–1935)은 즉위 직후 탕감령을 선포하고, 과도한 이자 누적에 따른 채무 노예화를 해소하였다.
이자율 자체보다는 거시적 수준에서 채무 구조를 정치적으로 재조정함으로써 이자율 변동의 폐해를 완화하였다.
메소포타미아의 이자율은 단순한 수치가 아니라, 농업경제, 정치 권력, 기후 조건, 무역 네트워크 등 다양한 요소가 결합된 결과였다. 고정된 법정 이자율과 시장 이자율 간의 긴장은 채무 불이행, 노예화, 분쟁으로 이어졌으며, 왕권은 이를 탕감령을 통해 간헐적으로 조정하였다. 이자율의 변동성은 곧 고대 근동 경제의 불안정성과 제도적 조절 능력을 동시에 보여주는 지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