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cob Little 1809-1865

by S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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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Little

미국 매사추세츠 주 출생, 젊은 시절 뉴욕으로 이주해 주식 중개 및 투자 분야에 입문했다.

1830년, 자신의 이름을 건 투자 중개 회사 Jacob Little & Company 설립.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점차 확대되며 대중화되던 시기, 주식, 채권 중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트레이딩을 시작했다.


He was the first to make short selling a recognized strategy rather than a shady tactic.
그는 공매도를 음지의 전술이 아닌 인정받는 전략으로 끌어올린 첫 인물이었다.
- Sobel, R. (1975). The Big Board



The Original Bear of Wall Street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공매도 Short Selling 전략을 활용했다.

1837년, 약세장 폭락을 예견하고 대규모 공매도 이익을 얻으며 명성을 얻었다. 이후에도 주가폭락 시점마다 과감한 공매도를 통해 수익을 올렸고, 여러 차례 파산을 겪으면서도 매번 재기했다. 매도 포지션 위주의 기법으로 The Original Bear of Wall Street 혹은 The Great Bear라는 별칭을 얻었다.

당시 파산법상 채권단에 대한 완전 변제를 강제받진 않았지만 늘 채무를 갚으려 했다는 언급이 있다.



1857년 공황 시기의 손실

Ken Fisher의 언급에 따르면, 네 번의 파산 동안은 재기에 성공했으나 다섯 번째에선 실패했다.

공매도자에게 엄청난 수익 기회인 1857년 공황 때 실패했는데, 공매도 포지션을 보유한 채로 주가 붕괴 직전의 마지막 상승 구간에 인도 시한이 걸렸다. (주가는 상승하는데 상환일이 다가왔다.)


그렇게 철도 주식 10만 주를 공매도한 상태로 상승 구간에 갇혀 200만 달러의 이익을 유지하다가 1856년 12월, 1000만 달러의 손실을 냈다. 그리고 몇 달 후 철도 주가는 하락 반전하여 63달러에서 8달러로 폭락했다. 공매도의 약점에 의한 손실이기도 하고(손실이 무제한이며, 시간의 흐름은 적대적이다.), 극단적인 레버리지의 영향이기도 하다.


이후 리틀은 한 번에 다섯 주를 매매하는 수준으로 자산이 줄었고 리틀에 이어 월스트리트의 중요 인물로 떠오른 Daniel Drew에게 "리틀의 유일한 실수는 20년 앞질러 태어난 것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사망과 의의

1865년 사망했다.

리틀이 공매도했던 철도 주식은 당시 미국 산업혁명과 교통 혁신의 중심이었다. 이는 철도주가 투기적 버블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리틀의 전략은 단순한 도박이 아닌 시대 흐름에 대한 통찰이 바탕되었음을 보여준다. 결코 매매 우위가 없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실질적으로 미국식 헤지 전략과 숏 포지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약세장에서도 돈을 벌 수 있다"는 패러다임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줬다.

Jesse Livermore는 대표적인 리틀의 추종자다. 과한 레버리지, 잦은 파산과 재기 등 장점도, 단점도 비슷하다.


I shall rise again. Who will go with me?
나는 올라갈 거야. 누가 나와 함께 가지 않겠는가?
- Little의 유언



Ref.

Sobel, R. (1975). The Big Board: A History of the New York Stock Market. Free Press

Fisher, K. (1989). The Market That Made 100 Minds. John Wiley & Sons Lim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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