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퍼즐 조각 찾기

아버지의 아버지

by 이소라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세운 것으로 유명한 조용기 목사가 돌아가셨다. 엄마 집에 갔더니 기독교 TV에서 그분의 장례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조 목사가 아빠와 고등학교 동창이라 동갑인 줄 알았더니 아빠보다 두 살 어리더라.”라는 엄마의 말에 그분과 아빠의 인연이 생각났다. 엄마는 아빠가 국민학교를 2년 늦게 들어간 사실을 잊고 있다가 새삼 생각이 났다고 했다. 그 연유는 이러했다.


1891년생인 나의 할아버지는 가난해서 장가를 못 가고 있다가 스물아홉에 간신히 띠동갑인 나의 할머니와 결혼을 했다. 할아버지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 깡촌이었는데 신접살림 마련을 위해서 상주장으로 가재도구를 사러 간 길에 3‧1 만세운동을 만났다고 한다. 성주에서 상주까지는 도로 사정이 좋은 지금도 승용차로 한 시간이나 걸리는 거리이다.

성주보다는 상주가 대처였는지 할아버지는 얼마 후 먹고 살길을 찾아 상주로 이주했다. 그때 당신의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조카들까지 이끌고 갔다. 그 후 할아버지는 대가족을 이끌고 다시 부산으로 이주했는데 그것은 나의 아빠가 예닐곱 살 되었을 때였다. 내 아빠 위로 나이 많은 형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에게 고등 교육을 시킬 목적이었는지 할아버지는 부산의 중심인 초량동으로 이사를 했다. 지금 살아계셨으면 100세 가까이 되셨을 큰아빠는 우리 아빠보다 잘 생기고 머리도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대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갈 때 나의 아빠만 상주에 남겨졌다. 할아버지의 큰아들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데려가야 했고 막내아들은 아직 어려 엄마품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지만 나의 아빠는 웬만큼 자랐기 때문이었을까? 부산 가서 자리 잡으면 데리러 오겠다고 하고 간 후 2년이 지나도록 데리러 오질 않아서 나의 아빠는 자기가 버려진 줄 알았다고 한다. 작은 집 식구들까지 이끌고 부산으로 가면서 본인만 데려가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당시 아빠가 맡겨진 곳은 이웃 아저씨 댁이었는데 무척 가난한 집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마흔 살쯤에 엄마와 함께 자기를 돌봐준 상주 아저씨 댁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70년대인 그때도 그 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빠가 1934년생이니 정상적인 경우라면 1941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갔겠지만, 언제 부모가 데리러 올지 알 수도 없는 아이를 학교에 보낼 생각을 누구도 하지 못했나 보다. 당시는 한두 해 늦게 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예사였다. 누구에게나 힘든 시절이었으니까. 아빠는 2년 후 할아버지가 부산으로 데려간 후에야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아빠가 고아나 마찬가지로 2년의 세월을 보냈던 이유는 이렇게 밝혀졌다.


이 사연은 천안에 계신 삼촌에게 들어서 알게 되었다. 삼촌은 아빠보다 열 살 아래인, 아빠의 유일한 동생이다. 엄마는 몰랐던 이야기를 삼촌은 알고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에서 빠진 퍼즐 조각을 삼촌의 이야기에서 찾아 끼워 맞추면서 할아버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초량동에 살 때 할아버지는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목재소에서 일하며 돈을 착실히 모았다. 큰아들도 공부를 마치고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큰아들의 혼사를 서둘렀다. 우리 아빠 다음에 태어난 4명의 자녀가 전염병으로 죽어버렸기 때문에 얼른 후사를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죽음의 그림자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사돈 자리와 취중 혼담 끝에 데려온 며느리는 폐병을 혼수로 가지고 왔다. 며느리는 첫딸을 낳고 죽었고, 그렇게 남은 손녀를 할머니가 젖을 먹여 키웠다. 살아 있었으면 나의 사촌 언니가 되었을 그 손녀는 삼촌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고 한다. 결국 이 아기도 죽었고 나의 큰 아빠에게도 폐병이 옮아 붙어서 아내와 딸의 뒤를 따랐다.

큰아빠가 아직 살아있었을 때 할아버지는 집안의 희망인 장남의 병을 고쳐보겠다는 생각에 초량동 생활을 접고 수영동으로 이사했다. 수영동은 임진왜란 때 조선 우수영이 있었던 바닷가 마을이다. 이때도 할아버지는 작은할아버지 식솔들을 이끌고 갔다 한다. 결국 큰아빠도 허망하게 죽고 말았지만, 할아버지는 수영에서 자리를 잡았다. 아들의 시신을 묻은 땅에 살고 싶었던 것일까. 당시 중늙은이가 되었을 할아버지에게 새로운 인생 계획을 세울 기력도 없었을 것이다. 성주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초량으로, 초량에서 수영으로 이사한 할아버지는 수영에 살다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진해 우리 집으로 오셨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상상해본다. 큰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는 환갑쯤 되었으리라. 피붙이를 아홉이나 잃은 환갑 노인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나는 ‘증조할머니 묫자리 사건’이라는 글에서 중학생인 우리 아빠가 집안을 대표해서 동네 어른들에게 항의하러 갔던 이야기를 썼었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시는데 왜 우리 아빠가 어려운 일을 자처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기억 속에 할아버지 댁은 늘 수영에 있었다. 엄마는 방학 때마다 나를 수영에 보냈는데, 삼촌과 숙모, 그리고 작은할아버지 댁의 삼촌과 고모들이 있는 그곳은 나의 천국이었다. 동생들은 진해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수영 이씨네 집안의 유일한 어린아이였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신 데다 새벽부터 논밭으로 일을 나가셨기 때문에 나와 마주 볼 일이 별로 없었다. 내 눈에 비친 할아버지는 늘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걸 알았다면 할아버지에게 좀 더 살갑게 대했을 텐데...


할아버지는 내가 결혼하고 딸을 낳은 후에도 생존해 계시다가 아흔아홉에 돌아가셨다. 그때는 별로 슬프지도 않았는데 이제야 눈물이 난다. 늘 방안에만 계셨던 할아버지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할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이 호열자로 죽었을 때 가마니에 싸서 지게에 지고 산에 갖다 묻었다고 한다. 증손녀를 보고 웃음 짓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아빠와 닮은 그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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