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연극

고부갈등을 최소화하는 방법

by 이소라

내 나이 10살 무렵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우리 집으로 와서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빠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 쭉 진해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일본군 장교의 관사였던 우리 집은 마당이 운동장만 했는데, 엄마는 마당 한쪽에 방 두 칸을 만들어 한 칸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지내시고, 또 한 칸은 세를 주었다.

지금의 내 나이 정도였을 나의 할머니는 열두 살이나 많은 남편보다는 아들인 내 아빠에게 훨씬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자식들을 줄줄이 앞서 보낸 할머니에게 아빠는 남아있는 두 아들 중 장남이었다. 서울대학교보다 들어가기 어려웠다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가 된 아빠는 할머니에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겠는가!

할머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어머니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늘 엄마가 할머니 보고 이래라저래라 했다. 나는 할머니가 화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엄마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아빠가 출퇴근할 때 제일 먼저 달려 나갔다. 아빠가 장기 해상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에는 할머니가 아빠 손을 꼭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고 한다. 그 모습이 엄마에겐 썩 달갑지 않은 장면으로 남아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리 삼 남매가 모두 출가한 후 엄마 아빠가 할머니를 모시고 대전에 살던 때가 있었다. 어느 날 친정에 간 나는 엄마 아빠가 부부동반으로 어딘가 다녀오는 것을 보고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묻는 할머니 말을 엄마가 매몰차게 끊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엄마가 그때 왜 그랬는지 물어볼 수도 없었다. 이제는 엄마의 그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아빠와 엄마는 젊었을 때 자타공인 잉꼬부부였지만 그 당시는 두 분의 결혼 생활 중 유일하게 사이가 안 좋았던 시기였다. 아빠에 대한 미움까지 더해져서 엄마가 할머니에게 그렇게 대했다고 나름의 해석을 내려본다. 물론 딸이 보는 앞에서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지지할 수 없다.


나의 고향 진해는 주민 절반이 군인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관학교 선후배이자 직장 동료인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았고 그 때문에 모두가 일가친척 같았다. 지금 엄마와 자주 만나는 이봉심 작가는 아빠의 사관학교 동기생 부인인데, 그 가족과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살았다.

장교들은 저녁 모임도 자주 가졌다. 미국식 군제를 따른 우리나라 해군 장교의 사교 모임은 미국식 파티 같은 것이어서 주로 부부 동반으로 이루어졌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부부만 외출할 때 눈치가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동기생들과 파티를 하러 가면서도 다른 집에 대소사가 있는 것처럼 둘러댄 적이 많다고 한다.

한 번은 엄마가 동기생 모임을 앞두고 입고 갈 옷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더니 아빠가 옷 한 벌 새로 사 입으라고 했다. 새 옷을 입고 나가는 것을 보면 할머니가 알아차리고 둘만 좋은 데 가는 것도 모자라 옷까지 사 입었다고 여길 것 같아서 엄마가 주저하자 아빠가 기막힌 아이디어를 냈다. 모종의 연기를 하자고 한 것이다. 엄마가 할머니 듣는 데서 “입고 나갈 옷이 없네요.”라고 말하면 아빠가 “당신 몇 년 전에 산 옷 있잖아? 그거 입지?”라고 말하기로 했다. 몇 년 전에 산 옷이라서 할머니가 못 보신 걸로 하자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연기를 하고 엄마 아빠는 저녁 모임에 갔다.

아빠는 그렇게 아내를 위하면서도 부모와 갈등을 만들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자신의 부모를 오래 모셨다는 것 때문에 엄마에게 평생 미안해했다. 다른 남자 같았으면 부모 봉양은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며 당연히 여겼을 것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 내가 몰랐던 아빠의 젊을 때 일화를 가끔 듣게 된다. 엄마가 신세타령을 덜 하니까 나도 엄마 말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생긴다. 우리 아빠는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놓고 가셨다. 오죽하면 외할아버지의 젊은 날을 잘 모르는 우리 집 막내도 할아버지 하면 사랑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고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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