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해결 과제
오늘 아침 엄마는 기분이 좋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2주 만에 꿈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빠와의 추억을 글로 써 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 어제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엄마는 원래 문학소녀였다. 부산의 명문 여고를 나오고 국립대학 국문과에 입학했지만 가정형편이 기울어 중퇴를 했다. 아빠 이야기를 글로 쓰면서 그토록 다정했던 남편이 왜 꿈에는 한 번 나타나지 않느냐고 원망을 했다 한다. 밤늦게까지 글을 쓰다가 잠이 들었는데 드디어 아빠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아빠는 옅은 카키색 춘추 정장 차림이었다고 한다. 어딘가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상황이었는데 도착할 시간보다 일찍 오셨더란다. 꿈에서는 한눈에 상황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손을 번쩍 들고 엄마에게 다가오는 아빠를 보니 아빠의 양복 단추가 모두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이었다. 그것을 보고 엄마는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한다. 군복도 아닌 양복에 웬 금단추였을까?
꿈에서 깬 엄마는 금단추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다가 무릎을 탁 쳤다. 하늘나라 계급장이구나! 장성이 되지 못했던 아빠에게 하나님의 하늘의 별을 달아주신 것이었구나!
아빠가 천국에 가신 것을 보여준 꿈이라 믿어져서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엄마가 만족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엄마 마음이 기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엄마가 우리 집에 마실 와 있을 때 둘째 딸이 집에 들렀다. 딸은 난데없이 할아버지를 꿈에 본 이야기를 했다. 그저께 밤에 할아버지가 꿈에 나왔다고 했다. 마지막 시간에 그랬던 것처럼 아파서 침대에 누워있던 할아버지에게 딸은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무엇이 미안했는지 딸에게 묻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시며 할머니에게 잘해드리라고 했다 한다. 딸은 그 말을 듣고 울었다고 했다. 딸에게 고마웠다.
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기 직전 딸은 일본에서 미용 서비스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딸이 육체노동을 하느라 지쳐서 집에 오면 혼자 있는 것이 너무 외로워서 단것을 마구 먹는다는 편지를 받고 마음이 아팠었다.
내 딸은 최근까지도 노인들 말씀에 “네네” 하기보다는 따박따박 토를 달았다. 엄마인 나도 그랬으니 나를 보고 배운 것이다. 딸은 자신의 그런 언행이 할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내 딸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점점 성숙해져 가는 것이 느껴진다. 오늘 했던 꿈 이야기도 그의 성숙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 같다.
죽은 사람이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혼자되신 큰동서도 아주버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 꿈에 나타나셔서 크게 위로받았다고 하셨다. 아주버님이 환하게 빛나는 큰 문 앞에서 활짝 웃고 계셨다고 했다. 천국에 가셨음을 암시하는 꿈이라고 받아들인 큰동서는 남편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덜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셨다. 이렇게 고인이 꿈에 나타나는 현상을 그의 영혼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인 것 같다. 이러한 메시지는 고인이 주는 것일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일까? 아니면 남은 자의 간절한 바람이 무의식을 자극하여 그런 꿈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엄마의 소망은 아빠가 천국에서 편히 쉬고 있기를 바라는 것이고, 내 딸의 소망은 할아버지가 자신을 용납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소망이 그런 꿈을 만들어냈다고 보는 것도 타당한 해석이다. 그렇다면 아빠에 대한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아빠와 나의 미완결 과제는 무엇일까?
나는 혈육에 대한 애착이 끔찍한 아빠의 첫 번째 소생이다. 다른 집과 달리 나는 딸이라고 차별받은 일이 없었다. 아빠 사랑의 총량이 100이라면 50은 내가 받았을 것이다. 사실 이런 양적 비교는 의미가 없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면서 나를 사랑했고, 나를 사랑하면서 내 딸들을 사랑해주셨기 때문이다. 하여간 내가 받은 사랑은 컸다.
그런데도 나는 마지막 몇 년 동안 아빠를 미워했다. 이성적 판단이 완전히 무너지고 걱정 제조기가 되어버린 아빠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아빠를 미워하는 나 자신이 미워서 그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글을 썼다. 아빠를 이해해보려고, 그리고 나를 이해해보려고 말이다.
지금 나는 아빠를 얼마나 이해하게 되었는가? 글을 쓰기 위해 아빠 인생의 에피소드들을 주워 모으면서 아빠를 조금씩 조금씩 더 이해하게 되었다. 상주에서의 잃어버린 2년이나 증조할머니 묫자리 사건 같은 것을 발굴하면서 아빠의 끔찍한 혈육 사랑과 지나친 책임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과 책임감은 부작용을 낳았다. 아빠 자신은 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었고 그 사랑의 대상들은 무능해졌다. 아빠는 가족들을 disempowering(능력 빼앗기)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홀로 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지 못했다. 주는 기쁨이 너무 큰 나머지 가족들을 늘 본인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다. 본인이 도울 수 있는 범위 안에 두려고 했다. 관심이 지나쳐 간섭이 되었다.
같은 남성인 아들이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아빠가 힘을 행사하는 만큼 동생은 힘을 잃어갔다. 지금 동생은 완전한 무능력자가 되었다. 아빠와 싸울 힘이 없어서 미국으로 피신했지만 여전히 자기 내면에 살고 있는 아빠의 평가와 지배 아래 있다. 동생의 남은 과제는 자기 속의 아버지를 벗어버리고 자기가 자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동생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자기 생의 계획을 스스로 디자인할 능력이 없다.
나는 아빠보다는 엄마와 투쟁했다. 늘 나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엄마를 극복하는 일이 내 성인기의 주요 과제였다. 내 나이 육십이 넘은 지금 드디어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아빠와는 별로 갈등이 없었기 때문에 아빠와 이별하는 것이 슬퍼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아빠가 돌아가셨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곡하는 것이 가식적으로 보였다. 가슴이 사막처럼 바싹 말라버렸다. 나는 분명 아빠를 사랑했는데, 어렸을 때 엄마에게 혼날 때마다 아빠를 부르며 울었는데, 지금의 나에게 아빠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