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친정엄마는 일관성 결핍, 남편은 융통성 결핍이다. 엄마의 변은 ‘사람은 마음이 바뀔 수도 있다’라는 것이며, 남편의 변은 ‘계획하지 않은 일은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다. 이십오 년 동안 엄마에게 길들여진 나에게는 남편의 일관성이 융통성 결핍으로 보였다.
신혼 초 남편과 함께 쇼핑하러 나가면 꼭 싸우게 되었다. 남편은 뭔가를 사러 갔다면 그것만 사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자주 외출하지 않기 때문에 나간 김에 더 살 것이 없는지 둘러보곤 했다. 그렇게 해찰하는 나를 남편은 견디기 어려워했다. 기본적으로 쇼핑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쇼핑을 싫어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생활을 해야 하니 쇼핑을 안 할 수는 없었는데, 자꾸 불쾌한 일이 생기니 남편과 함께 뭘 사러 나가는 일은 신혼 초에 끝나버렸다.
우리 엄마의 쇼핑 습관에 대해 말하자면 옛날부터 백화점이나 쇼핑몰보다 재래시장이나 단독 점포를 선호했다. 그런 곳은 가격 흥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격 흥정에선 언제나 엄마가 이겼다. 나는 그런 엄마가 부끄러웠다. 상인들이 파는 물건도 돈 주고 사 온 것일 텐데 절반 가격으로 후려치는 것은 얌체 심보로 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가격 흥정에서 패배한 상인이 우리 뒤통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볼일이 끝나면 나는 시장을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는 내 마음과 달리 그렇게 사 온 물건을 교환하거나 환불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물건을 바꾸러 시장까지 다시 가는 것이 귀찮기도 했지만 상인의 얼굴에 떠오르는 실망과 혐오의 빛을 보아야 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나는 지금도 마트에서 산 물건을 그 자리에서 교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웬만해선 구입한 물건을 교환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나에게 쇼핑은 즐거운 경험이 아니다.
사 온 물건을 바꾸기 잘하는 것으로 대표되는 엄마의 변덕 또는 일관성 없음은 나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나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했던 엄마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자기 마음대로 레슨을 중단시켰다. 어렸을 때는 연습시간을 채우는 것이 큰 고역이었는데 이제 간신히 음악을 즐기게 되니 피아노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집안 사정을 이유로 내세우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은 우리 가세가 갑자기 기운 것이 아니었고 단지 엄마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부모의 재력 없이 한국 땅에서 피아노로 성공하기는 어렵다는 어느 음대 교수의 말을 들은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다소 편협한 관점이었건만 엄마는 그분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나에게 피아노를 포기하라고 했다. 엄마의 꿈은 나를 교회 피아노 반주자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당시에도 나는 이미 교회 반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음대를 갈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앞으로 지불해야 할 레슨비도 만만챦고 학비도 다른 계열에 비해 비싼 음대를 보내는 것이 힘에 부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엄마는 내 의견을 한 번도 묻지 않았다. 내가 피아노를 계속하고 싶은지 묻기가 어려웠으면 ‘우리에게 너를 뒷바라지할 능력이 부족해서 미안하다’라는 말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나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할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고민 끝에 내가 정말 피아노 공부를 원한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부모가 뒷바라지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돈을 벌어가며 공부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때 엄마 마음대로 내 인생을 좌우했던 일로 상처받았던 나는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결혼 후 음대에 편입했다. 그 와중에 두 딸들에게 엄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죄책감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엄마의 일관성 없음이 나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빠가 아플 때였다. 집에서 아빠 돌보기가 힘들면 엄마는 우는 소리를 했다. 병원이나 시설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본인 입으로는 그 말을 하지 못하고 내 입에서 그렇게 하자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어렵사리 시설을 알아봐서 아빠를 입원시키면 엄마는 처음 며칠은 환희의 송가를 불렀다. 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그곳에 보내길 얼마나 잘한 일인지 자화자찬했다.
문제는 시설에 매일 전화해서 아빠가 만족해하신다는 말을 들어야 엄마 마음이 놓이는 것이었다. 아빠의 불평이 시작되면 엄마는 아빠를 집으로 모셔오고 싶어 했다. 아빠가 불쌍하다면서, 본인이 나쁜 아내인 것 같다면서, 집에 오면 뭐도 해주고 뭐도 해줄 수 있는데, 하면서. 어떤 때는 아빠가 잘 적응하고 계실 때도 퇴원시킬 이유를 찾아냈다. 엄마의 건망증이 심해진 것인지 단지 변덕스러운 성격의 표출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런 사이클을 대여섯 번 겪고 난 후, 엄마가 아빠를 또다시 병원에 입원시키자고 할 때 나는 엄마에게 당부했다. 이번에는 좀 오래 버텨보자고. 아빠가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겠느냐고. 또는 엄마가 외로워도 좀 참자고. 엄마가 약속을 해주어야 아빠를 병원에 모시겠다고 말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거 아이가!” 나는 돌아버릴 것 같았다.
엄마는 아빠의 거취를 정하는 일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입원도 퇴원도 내가 결정해주길 바랐다. 아니 결정은 본인이 했지만 관련된 치다꺼리를 내가 해주기를 바랐다. 그 결정을 너무 자주 번복하는 것이 문제였다.
아빠의 생애 마지막 몇 달 간도 입원 전 하소연과 입원 후 후회와 죄책감으로 채워졌다. 엄마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자신이 원해서 아빠를 입원시켰으면 거기에 따른 죄책감과 후회는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자신이 원해서 아빠를 퇴원시켰으면 거기에 따른 힘듦은 본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적어도 간병인이나 도우미를 써서 힘을 덜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다운 일상을 산다』의 작가 소노 아야코는 “노부모를 돌보는 수고를 덜기 위해 자신의 돈을 기꺼이 쓰기로 했다. 내 몸과 맘이 편하려고 쓰는 돈이야말로 최선의 지출이다”라고 말한다. 돈은 그럴 때 쓰려고 모아두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아빠에게는 적지 않은 연금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빠 돌보는 일에 돈 쓰기를 아까워했는데 그 이유는 남동생의 생활비와 손자들 학자금에 돈을 써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엄마에게 화났던 또 다른 이유는 아빠의 병이 나을 거라는 엄마의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빠는 아흔이 되어가는 노인이었고, 파킨슨병을 10년 가까이 앓았고, 치매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는데 엄마는 아빠가 나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낫지 않을 가능성도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빠가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이 올 거라는 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빠의 죽음을 예측하는 것이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지 몰라도 엄마는 목전에 닥친 아빠의 죽음을 회피하고 부정했다.
아빠의 죽음과 엄마 혼자 남겨질 시간에 대해 준비하시라는 나의 말에 사람이 아직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런 준비를 하느냐는 엄마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빠 없는 시간을 상상하기 싫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준비 없이 그 시간이 찾아왔을 때 엄마는 또 얼마나 힘들어할 것인가!
예상했던 대로 아빠가 돌아가신 후 1년 동안 엄마는 무척 외로워했다. 나는 엄마의 외로움을 덜어주느라 여러모로 노력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의 관심이 뜸해지면 “이러다가 사람 하나 죽어도 모르겠다!”라는 말로 내 심장을 후벼 판다.
엄마의 외로움에 대해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외로움을 느끼는 일에 대해 엄마 자신의 책임은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