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의 실패는 누구 탓인가
나의 아버지는 걱정 병 환자였다. 걱정 병이란 의사가 노인들을 이해시키려고 쓰는 용어다. 정식 병명은 노인성 우울증이었을 것이다. 아빠에게는 걱정이 일이었다. 때로는 아빠가 걱정을 즐기는 것이 아닌지 궁금할 정도였다.
군인이었던 아빠의 좌우명은 유비무환이었다. 군인은 적이 침투할 것에 대비해 늘 경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아빠는 죽을 때까지 군인정신을 버리지 못했다.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하신 아빠에게는 처음부터 지휘관의 임무가 주어졌고, 훌륭한 지휘관이 되고자 했던 아빠는 부하들의 생명이 자신에게 달렸다고 철저히 믿으셨다. 그러한 믿음의 연장선상에서 자식들의 운명도 당신에게 달렸다고 생각하고 나와 동생들에게 가장 안전한 길을 찾아주려 하셨다.
그 시절 어느 부모가 그러지 않았을까만 우리 부모님이 자식의 미래를 위해 하신 일은 유별났다. 남동생이 대학 입학시험을 치렀던 80년대 초에는 입학 원서를 접수할 때 학과별 지원율이 실시간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당연히 휴대전화기도 없던 그 시절에 아빠와 엄마는 무전기로 교신하며 두 대학교의 의과대학과 치과대학 경쟁률이 올라가는 것을 체크하다가 마감 직전에 네 군데 중 유일하게 정원이 미달한 Y대 치과대학에 원서를 투척했다. 유명대학인 Y대 치과대학에서 어떻게 지원자 수가 모집정원에 미달했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식구들과 달리 눈치작전에 실패한 사람이 많아서였을까?
입시전쟁에서 자신의 작전이 통하여 승리를 거머쥔 아빠 마음이 얼마나 흡족했을까? 부모님은 물론 나도 동생이 Y대 치과대학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등하교 시간도 아끼라고 부모님은 학교 앞에 자취방도 얻어주었다. 그런데 동생은 종교 동아리 활동에 빠져 학업을 등한시했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하고 치과의사 생활을 시작한 동생은 사십 대 초반에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났다. 치과의사 생활에 진력이 난 것이었다. 그런데 석사학위 과정에서는 받아주었던 대학이 박사학위 과정에서 동생의 입학을 거절했다. 그 이유를 최근에 알게 되었는데, 학부 때의 성적이 발목을 잡아 입학허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동생은 박사과정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귀국하지도 않았다. 아이들의 교육 운운하며 미국에 더 있다 오겠다고 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대학에서 한국인 교수의 조교 일을 하며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다 모아둔 돈이 바닥나자 한국에 들어와 치과를 다시 개업했다가 페이 닥터 일을 하다가 했다. 일 년에 한 번꼴로 한국과 미국을 넘나들며 그렇게 했다.
동생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부터 아빠는 걱정과 염려에 싸여 지냈다. “생각 없는 놈!”이라는 말이 아빠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사십이 넘었으니 본인이 시행착오도 해보면서 자기 길을 찾아갈 것이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아빠는 걱정을 멈추지 않았다. 아들에게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바른길을 알려줘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빠의 걱정과 훈계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동생은 아빠가 걱정하고 훈계하는 만큼 아빠에게서 멀어졌다.
동생은 급기야 치과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손을 놓았다. 피자 배달을 한다, 우버 택시 기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아빠는 누구라도 만나기만 하면 아들 이야기만 늘어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다 못한 사람들이 걱정 그만하시라고 하면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화를 냈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빠의 걱정 리스트에 당신의 사망진단서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집에서 죽으면 사망진단서 써줄 사람이 없어서 병원에서 죽어야 한다며 수시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하였고, 병원에서 사흘만 지나면 사망진단서 이야기는 잊어버리고 집에 가자고 채근하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었고 어떨 때는 응급차 안에서 죽으면 진단서는 누가 써 주느냐며 걱정했다.
삼 년 정도 이런 사이클을 반복하다가 부모님이 대전으로 내려오셨다. 엄마 혼자 아빠를 감당하는 것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대전에 오신 직후에는 기분이 좋아서인지 주간보호센터에 다닐 만큼 건강이 좋았으나 결국 일 년 만에 주간보호센터를 졸업하고 다시 입·퇴원을 반복했다. 아빠의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지는 것이 보이고, 자식 노릇을 분담하지 않는 것이 괘씸하기도 하여 동생에게 한번 들어오라고 했다. 5년 만에 귀국한 동생은 우울증과 공황장애 증상을 보였다. 당시는 코로나가 극심했던 시기여서 동생은 격리시설에 2주 있었는데, 그동안 매일같이 전화해서 힘들어 죽겠다, 내보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동생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아빠는 80대 노인이니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동생이 더 걱정이었다. 나는 동생에게 한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며 비용을 대주겠다고 했지만 동생은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달 만에 미국으로 떠난 동생은 아빠의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다. 아빠 사후 1년 만에 날아온 소식은 동생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심해져서 세 번이나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아들 노릇 못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위인은 아니니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싶었다.
아빠의 일주기가 코앞에 다가왔다. 동생이 기념일에 맞춰 한국에 들어오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직계 가족 중 아무도 없다. 우리는 동생이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삼촌과 이모, 사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해하는 척할 것이다.
아빠와 동생의 관계에 대해 내 나름대로 정리할 필요를 느껴 이 글을 쓰고 있다. 동생이 망가진 것이 누구의 실패 때문인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밝히고 싶다. 그래야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 아닌가.
일차 원인을 아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아빠는 동생의 인생 계획을 대신 세워주었다. 그리고 당신 말씀만 들으면 동생에게는 탄탄대로가 보장될 거라고 믿으셨다. 사실은 동생을 위한 미래가 아니라, 온 집안을 위한 미래계획을 세우신 거였다. 우리 가족 모두 치아가 좋지 않기 때문에 가족 중에 치과의사가 하나 있으면 치과 보험에 가입한 거나 마찬가지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동생은 아빠에게 저항할 힘이 없어서 아빠 말씀을 따랐지만, 치과의사 생활이 그에게는 고역이었다. 그 생활이 싫다는 동생을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고 누구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동생은 마음이 여려 환자가 한 마디만 불평해도 큰 상처를 받곤 했다.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길을 억지로 가던 동생은 2년 단위로 병원을 팔고 새로 개업했다. 지금 생각하니 동생의 잦은 이동은 환자들을 피해 도망 다닌 것이었다. 언젠가 동생이 ‘환자는 다 원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와중에 교수가 되면 환자들에게 싫은 소리 안 듣고 존경받으며 살 거라는 생각을 했던가 보다. 그래서 떠난 유학길이었다. 동생의 선택이 아빠에게는 모조리 생각 없는 짓, 이해할 수 없는 짓으로 보였다. 돈 잘 벌고 존경받는 직업을 마다하다니!
아빠가 조금만 더 일찍 동생을 포기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조금만 더 일찍 실패할 기회를 주었으면, 조금만 더 일찍 자기 머리로 고민할 기회를 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아빠의 걱정 병을 사랑이 많아서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아빠가 사랑의 정의를 잘못 내리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사랑이 무어냐고 아빠에게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사랑이란 상대의 앞길을 인도해주고 그의 앞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이다’라고.
때로는 자식을 믿고 기다리며 가만히 있는 것도 사랑이라는 것을 아빠는 몰랐다.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지면 자기 무릎으로 일어나기도 하면서 인생의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법을 배우게 놔두는 것도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아빠는 몰랐다. 내 동생이 정말로 필요로 했던 사랑은 바로 그런 사랑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더 잘 안다’라는 신념으로 똘똘 뭉쳐서 자식을 보호하려 했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