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정면승부 1

아빠의 일주기 기념일에 일어난 일

by 이소라

아빠의 일 주기 추도식이 있는 날, 손님들이 오기로 되어 있는 시간보다 일찍 엄마 집으로 갔다. 식탁에는 과일과 음료가 차려져 있었고, 거실 장식장의 아빠 사진 옆에는 활짝 핀 양란이 놓여있었다. 소파 방석과 쿠션 커버는 풀을 빳빳하게 먹여 까슬까슬하게 만들어놓았다. 엄마의 살림 솜씨는 모자람이 없다.

한 주간 내내 엄마가 손님맞이 준비에 분주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도움을 자원하지 않았다. 나 자신할 일이 많기도 했고,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하실 수 있게 하자는 것이 아빠가 돌아가신 후 내가 세운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에게 시장 봐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 마음을 누르고 집 앞 슈퍼에서 장을 보았다(당신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피곤할까 봐 배려한 것이다. 전 같았으면 내가 먼저 전화해서 도와드릴 것이 있느냐고 물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엄마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것저것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을 것이고,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심부름을 했을 것이다. 엄마가 나에게 부탁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도와드리면 엄마는 매우 흡족해하셨고 지인들에게 딸 자랑하느라 침이 말랐다. 계속해서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았지만 나는 애써 억눌렀다.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면 해드릴수록 나에 대한 기대는 늘어만 갔다. 나는 지쳐 떨어질 때까지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고, 그러다 피로의 한계점에 도달하면 내 마음에는 엄마와 동생에 대한 원망이 쌓여갔다. 아들인 동생이 할 일을 내가 대신하고 있다는 불평이 자동으로 재생되는 것이었다.

KakaoTalk_20220803_115053558_01.jpg 문제는 수박이 맛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알뜰함이 몸에 밴 엄마는 재래시장에 비해 비싼 동네 슈퍼에서 장보기를 꺼렸다. 나는 엄마에게 슈퍼를 엄마 집 텃밭이나 창고, 또는 냉장고로 여기고 자주 이용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우리가 멀리까지 가서 물건을 사 오는 수고를 대신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고. 하지만 엄마는 설득되지 않았다. “유성에 나갈 일 있으면 뭘 좀 사다 다오.” 하거나 직접 버스를 타고 나가서 장을 보았다. 그러니 이번에 슈퍼에서 비싼 수박과 음료를 산 일은 엄마의 절약 정신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수박이 맛이 없었다는 것이다. 삼만 원 이상이면 배달해주는데 엄마는 - 배달해달라고 하기가 미안해서 - 그 무거운 수박과 음료를 몸소 손수레에 싣고 왔다. 슈퍼에서 엄마 집까지는 100 미터도 안 되는 거리지만 교통신호가 있는 건널목과 나무 데크, 잔디밭을 거쳐야 하는 길이라 노인이 손수레를 끌고 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느냐고 물어도 시원하게 대답을 안 하는 것으로 보아 엄마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인 것 같았다. 엄마가 쉬운 길을 두고 어렵게 돌아가는 것이 딱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여, ‘배달은 고객의 권리고 상인의 의무’라고 열변을 토했지만, 엄마의 대답은 “다음부터는 그 슈퍼에서 물건을 안 사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분이 상했다. 옛날부터 엄마는 대답이 궁해지면 교묘하게 화제를 돌리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치 떨리게 싫어하는 습관이다. 게다가 그 슈퍼는 우리 동네에서 유일한 일용품점이라 거기서 물건을 안 사면 어쩌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매번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겠다는 것인가 싶어 열이 확 올랐다. 엄마가 홀로서기를 해야 내가 엄마와 이웃하며 그럭저럭 살 수 있을 텐데 자꾸만 나에게 의존을 하려는 모습이 보여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나는 정색을 하고, “지금 배달 서비스를 받으시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엉뚱한 말씀을 하세요?”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니는 엄마한테 꼭 그렇게 지적을 해야겠나?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왜 그렇게 따지노? 오늘 같은 날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되나?”라고 반격했다. 죄책감으로 상대를 누르는 엄마의 전매특허 전략이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얼굴 찌푸리고 이 정도로만 말해도 나는 바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엄마의 죄책감 공격이 더 이상 효력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엄마가 바뀌지 않으면 나는 엄마와 이웃하여 살 수 없다는 마음이 요즘 와서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엄마가 말을 돌리거나 말거나 그냥 넘어가면 안 되냐는 말에 대해, “나는 평생을 그냥 넘어갔어요! 엄마 말에 불만이 있어도 무서워서 아무 말 못 했어요!”라고 대꾸했다. 엄마는 화내기 대장이기 때문에 누구도 엄마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불만을 말하지 않으니 엄마는 상대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이모들도 뒤에서만 쑥덕거릴 뿐 엄마 앞에서는 듣기 좋은 말만 했다.

그러나 엄마의 언어습관 중에서 내가 더 싫어하는 것은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말다툼은 엄마가 슈퍼에 대해 불평하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수박이 맛없다고 할 때부터 나는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엄마의 불평에는 늘 험담이 따라 나오는데, 이번에도 슈퍼 사장을 험담하는 것으로 들려 속이 상했다. 엄마는 누구를 순수하게 칭찬하는 법도 없었다. 엄마가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랑을 하는 것은 그 덕분에 당신의 위신도 같이 올라가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 순수한 칭찬이라고 볼 수 없었다.

내가 성장한 후에 말로 툭툭 거린 적은 있으나 정식으로 불만을 말하지는 못했다. 툭툭 거리기만 해가지고는 엄마가 내 뜻을 모르는 것 같아서 어느 날은 엄마의 행동 중 몇 가지를 고쳐주십사고 어렵사리 부탁한 적이 있다. 그때 엄마는 “어른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라고 단칼에 잘랐다. 다른 날은 “너는 감사할 줄 모르는 자식이다!”라는 말로 나를 제압했다. 그 후로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엄마는 바뀔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그저 자식의 의무만 다하면서 살자’고 결심했다.

엄마에게 화를 내기 시작하니 내 마음 깊은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 쓰레기가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예나 지금이나 성미가 급한 나의 엄마는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화부터 냈다. 엄마에게 혼나는 것이 일상이었던 그 시절, 말도 행동도 느렸던 나는 엄마에게 잘못을 추궁받으면 대답하는 것이 큰 고역이었다. 엄마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말을 더듬어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또박또박 말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엄마는 몇 마디 듣지도 않고 화제를 돌려버리곤 했다. 그때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비슷한 상황이 올 때마다 과잉 반응하는 것일까. 나는 어렸을 때 일을 이야기하며 엄마가 말을 돌렸을 때 내 기분이 얼마나 나빴는지 아느냐고 따졌다. 평생 처음 해보는 말이었다.

엄마는 당황했는지, “나보다 더 나쁜 엄마도 있잖아!”라고 변명했다. 어이가 없었다. 어른답지 않은 엄마의 말에 나는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맞아요, 엄마보다 나쁜 엄마도 많아요! 하지만 세상에서 두 번째로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이 엄마의 목표예요? 도대체 예수는 왜 믿어요? 다른 사람이 다 변화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잖아요? 적어도 우리는 다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라고 소리소리 질렀다. 60년 동안 하지 못한 말을 오늘 한꺼번에 하는 거니까 제발 변명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변명을 계속했다. 예수 믿는다고 다 변화되는 것 아니다. 변화가 말처럼 쉬운 일인 줄 아느냐, 변화가 그렇게 쉬운 일이면 이 세상에 나쁜 사람 하나도 없다고. 나는 제발 합리화 좀 그만하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이게 합리화하는 거냐?”라고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았다. “네 그게 합리화예요!” 했더니 조용해지셨다.

어려서는 힘이 없어서, 자라서는 엄마가 상처받을까 봐 엄마의 부조리함을 참고 넘겼건만 엄마는 여전히 자기를 그냥 봐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싫어하는 엄마의 행동을 조목조목 말하고 싶었지만, 손님들이 오실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 쪽에서 공격 일변도로 나가던 태도를 중단했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엄마가 잠잠한 것은 의외였다. 전 같았으면 엄마는 본인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 다른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불같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20803_113715297_01.jpg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다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이니 집안이 떠들썩했다. 과일과 음료로 마른 목을 축이고 각자가 가져온 선물을 교환했다. 시간이 되어 목사인 사촌 동생의 집례로 아빠의 일주기 추도예배가 시작되었다. 미국에 있는 동생네 가족과 조카네 부부, 서울에 있는 나의 큰딸까지 총 일곱 명이 화상 회의실에 접속하여 비대면으로 참여했다. 예배 후 아빠를 기리는 이야기를 한 마디씩 하고 현충원으로 이동했다. 이날 모인 사람들 대부분에게 아빠의 묘소 참배는 처음이었다. 이 중에 내년까지 살아계실지 알 수 없는 노인도 서너 명은 있었다.

예약해둔 군인휴양소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노인들 몇 분 외에는 모두 떠나셨다. 호텔에서 숙박하신 네 분의 노인을 다음 날 아침에 대전역으로 모셔다 드렸다.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제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이 어려운 이야기를 다시 꺼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엄마 집에 가서 어수선한 집 안을 대충 치운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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