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코더 대횟날 아침에 일어난 일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빠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하나씩 생각난다. 막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당시는 부모님이 서울에 사셨는데 두 분은 일 년에 서너 번은 우리 집에 오셔서 사나흘 머물다 가셨다. 부모님이 와 계시던 어느 날 막내가 참여하는 교육감 배 초등학교 합주대회가 있었다. 알토 리코더를 연주하는 딸은 리코더 합주단의 에이스였다.
아이는 학교에 가기 위해 합주단 단복을 차려입는 중이었다. 평소에 입던 옷이 아니라 손이 많이 갔다. 넥타이도 매야 했고 줄무늬 반 스타킹도 신어야 했다. 그때 아침 식사를 마친 아빠가 우리 집 강아지 호두를 데리고 나가셨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로 아빠가 나가신 것을 알았다. 그때라도 뛰어나가 말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이 터졌다. 아빠 말씀에 의하면 우리 층인 23층에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중간층 어딘가에 섰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호두가 쏜살같이 문밖으로 내달렸다. 로비 층인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산책하러 나갈 때마다 방광이 배출 신호를 격하게 내보내는지 호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 출입구까지 가는 속도는 거의 빛의 속도다.
아빠는 개를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고 했지만, 파킨슨 병이 있는 아빠의 동작은 느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속도는 너무 빨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후 아빠 손에는 개 목줄 손잡이만 남아있었고 개 목줄 끝에는 개 목걸이만 남아 있었다. 개 목걸이가 빠졌기에 망정이지 호두 목에 걸려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호두의 작은 머리가 그때만큼 고마웠던 적이 없었다.
아빠는 계면쩍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개를 잃어버렸다고 하셨다. 건강할 때였다면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것을 보고 열림 버튼을 누르셨을 것이다. 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닫히는 문을 무력하게 바라보며 서 있던 아빠는 엘리베이터가 1층까지 내려가자 엘리베이터 출구 근처에서 개를 찾아보았지만 없었다고 했다.
외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막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일대 사건이었다. 그날은 결혼한 큰딸도 우리 집에 와 있어서 나와 큰딸이 개를 찾으러 나섰다. 딸보고 지하 주차장에 가보라고 했다. 호두가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서 주차장으로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한창 출근하는 차들이 많은데 호두가 차에 치일까 봐 걱정되었다. 나는 아파트 산책로를 뛰어다니며 "호두야!" 하고 불렀다. 그러나 우리는 개를 찾는 데 실패했다. 막내의 신발을 언니가 신고 나오는 바람에 막내까지 밖으로 나왔다.
울먹이는 막내를 달래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한 남자아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18층에서 호두를 보았다고 말했다. 막내의 학교 친구인 이 아이는 호두가 우리 집 개인 것을 알고 있었다. 아빠가 호두를 놓친 것이 18층이었던가 보다.
우리는 18층에서 내렸다. 호두는 여기서 내려 어디로 갔을까? 18층 복도에는 네 가구의 현관문과 계단실 문이 있었다. 우리는 계단을 위아래로 훑어보기로 했다. 나는 아래쪽으로, 아이는 위쪽으로 갔다. 1분도 안 되어 “찾았어!”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만 두 살 된 시츄 견인 호두는 어두운 계단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호두를 아이가 안고 들어왔고, 호두를 내려놓자마자 아이는 학교로 갔다. 아침 댓바람에 벌어진 소동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여유도 없이, 호두를 달랠 사람도 없이, 나머지 식구들은 서둘러 합주대회 장소로 갔다.
아이들의 리코더 합주는 훌륭했고, 중요한 파트를 맡은 딸은 겉으로는 씩씩하게 솔로를 연주했고, 아이의 리코더 팀은 예상대로 1등을 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이가 속상한 마음을 억누르고 리코더를 연주할 때 마음이 어땠을까 싶었다.
그날 일을 떠올릴 때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목줄이 빠지지 않았더라면, 호두가 주차장으로 내려갔더라면, 18층 아이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호두를 찾았을까? 호두를 잃어버렸다면 막내는 리코더 연주를 차질 없이 할 수 있었을까? 사실 리코더 대회를 망쳤다 해도 세상이 무너질 일은 아니었다. 개를 잃은 아이의 슬픔이 진정될 수 있었을까가 더 문제였다.
파킨슨병으로 동작이 굼뜨고 치매도 진행 중이었던 아빠는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다음에 내려오셨을 때도 호두를 산책시키고 싶어 하셨고, 나는 질색하며 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