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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26. 2022

노예로 산다는 것은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을 읽고

    노예제도 아래에서 백인인 루퍼스의 사랑 덕분에 위태로운 자유를 누리고 있던 흑인 여자 앨리스는 완전한 자유인인 다나에게 “노예로 사는 건 어때요?”라고 질문한다. 다나는 이 질문이 매우 생경했다. 자신은 노예였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나는 대여섯 번의 시간여행을 통해 자신이 점점 노예의 삶에 적응해가는 것을 느끼고 소스라친다. 옥타비아 버틀러는 이 소설을 통해 1970년대에 교육받은 사람이자 작가로서 그 자신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믿었던 다나가 노예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다나가 처음 루퍼스를 만났을 때 둘의 관계는 어른과 아이의 관계였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둘의 관계는 점차 노예와 노예 주인의 관계로 바뀌어간다. 이러한 관계 변화는 루퍼스가 나이 들면서 자기 아버지의 생각과 태도를 내면화하게 되고, 다나 자신도 자유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점차 잃어가면서 진행된다. 

    1976년도의 다나는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가난했으나 글 쓰는 사람으로 살기를 선택했고, 글 쓰는 시간을 얻기 위해 노동을 했다. 그리고 외삼촌과 외숙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인과의 사랑을 선택했다. 그녀가 원치 않는 삶을 살도록 강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1819년으로 불려가면서부터 자기 몸에 대해 통제력이 없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두 번의 시간여행과 복귀의 과정을 겪으면서 왜 과거로 불려가는지와 어떤 경우에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지를 알게 된다. 그러나 그 시점이 언제일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 있으면서도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녀는 언제 과거로 불려갈지 몰라 불안해했고, 과거로 불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사람 케빈이 거기 있기 때문에 과거로 가고 싶어 했다. 이런 불안정한 시간을 통해 그녀의 내면은 노예화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무력감이 반복되고 지속될 때 노예화의 기초가 놓인다. 노예화의 두 번째 조건은 두려움을 학습시키는 것이다. 노예가 계속 노예로 남아있도록 하기 위해 노예 주인들은 노예들에게 두려움이 무엇인지 꾸준히 상기시킨다. 두려움이 없어질 때 그들은 더는 노예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 다나는 순찰대원들이 앨리스의 아버지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기 이전에는 그 시대에 흑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즉 흑인이라면 무엇을 무서워해야 하는지 몰랐다. 앨리스의 아버지가 린치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 다나는 그저 관찰자에 불과했지만, 본인이 톰 와일린에게 채찍질을 당했을 때는 그 공포가 그녀 자신의 것이 되었다. 노예 주인들은 노예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그들에게 매질하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주인에게 반항하다가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본보기로.

    등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의 기억은 다시 그런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로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예화의 세 번째 조건은 노예들끼리 이간시키는 것이다. 리자는 다나를 질투하여 다나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루퍼스에게 고자질했다. 노예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권력은 주인의 사랑 또는 호의였는데, 다나는 리자보다 바느질을 잘해서 리자의 일자리가 위태로워졌던 것이다. 리자도 결국 앨리스에게 보복당했지만, 이런 식의 시기와 질투는 노예 주인들이 노예를 좀 더 수월하게 부리도록 해주는 수단이 되었다. 

    노예화의 마지막 조건은 노예인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노예의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20세기를 살아가는 다나도 자기 외숙모로부터 “내가 산채로 네 껍질을 벗기고 말테다!”라는 말을 들었고 외삼촌의 허리띠로 맞기도 했다. 다나의 외숙모는 이런 말을 누구에게 들었겠는가? 자기 부모에게 들었을 것이고 그들은 또 그들의 부모에게 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과 내부분열, 그리고 자기 노예화(또는 노예들의 자기복제)를 통해 노예화는 점점 더 공고화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인이 선심 쓰듯 마련해준 초라한 오두막을 안식처로 생각하고 그곳에 있을 때 안도감을 느낀다.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그 어느 곳이 아니라 노예로 사는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난다. 

    자유인이었던 다나마저 과거로 몇 번 타임슬립 한 후에는 오히려 19세기 시대 와일린의 집에 향수를 느낀다. 처음에는 관찰자요 연기자로 살던 다나는 언제부터인가 연기가 아닌 진짜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끼고 노예처럼 자기를 변호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순종하는 삶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사람도 노예화의 조건이 갖추어지자 그토록 쉽게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을 볼 때, 노예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노예의 운명에 저항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까 싶다.

현대에도 노예는 존재한다

    현대에는 노예제도가 없으나 노예는 존재한다. 자신의 삶에 통제력을 상실한 사람, 두려움 때문에 타인의 지배를 받는 사람, 친구를 적으로 오인하는 사람, 타인도 자기처럼 무기력하고 의존적이고 배타적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모두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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