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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31. 2022

사람이 온다

이향규의 『후아유』를 읽고

    이 책이 나의 사고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인간을 집단의 일부로 보는 시각이 전보다 훨씬 줄어든 것이다. 내 나름대로는 사람들을 고정관념의 렌즈로 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장애인, 탈북자, 외국인학생 등의 단어가 전혀 거북하지 않게 다가왔던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범주화해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지난주에 우연히 <진희의 꿈>이라는 연극을 관람했다. 서사 속의 실제 인물인 동시에 연극의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박진희씨는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나는 사십 대에 밀알선교회라는 단체를 통해 그녀와 만난 적이 있었다. 다니던 교회 여선교회에서 봉사활동 차원에서 밀알선교회와 교류했기 때문이다. 선교회 대표에게 우리가 무엇을 도와주면 좋을지 물었더니 가끔씩 장애인들과 함께 나들이를 해달라고 했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휠체어를 밀고 장애인들과 산책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박진희씨는 우리와 비슷한 연배라서 진희씨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녀는 당시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글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했다. 얼마 후에는 그룹홈에서 독립하여 혼자 살 거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아는 진희씨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밀알선교회와의 인연이 끊어지고 그녀와도 작별했다. 그런데 지난 주에 그녀의 이름과 사진을 포스터에서 보고 나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여 연극을 관람하러 갔다.         

진희의 꿈 포스터

    작은 규모의 소극장 입구가 관객들로 북적였다. 극이 시작되기 전 복도에 전시된 박진희씨의 시와 캘리그라피 작품을 관람했다. 그중에 ‘부자’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나는 부자이다/꿈이 많기 때문에./난 부자이다/외로울 때 위로해 줄 사람이 많기 때문에./난 부자이다/기쁠 때 함께 기뻐해줄 사람이 많기 때문에./난 부자이다/먹고 자고 할 수 있는 내 집이 있기 때문에./난 부자이다/어디든 갈 수 있는 전동 휠체어가 있기 때문에./재물이 없어도 하고 싶은 것 하고 살면 부자이다.” 

    연극 팜플릿 첫 페이지에 소개된 연출자의 말도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연극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감사를 표하다가 마지막에 “친구가 되어 주신 멋진 어른 진희님”이라고 썼다. 그녀가 자신과 박진희씨를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경계 짓지 않고 젊은이와 어른으로 구분하는 것이 내게는 작은 충격이었다. 그 문구를 읽으니 진희씨는 분명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있을 거라는 기대와 흥분이 생겼다.  

    시간이 되어 입장하니 맨 앞줄은 배리어프리 좌석으로 지정되어 장애인들의 휠체어 7대가 자리했다. 그 다음 석 줄은 비워서 뒷사람의 시야가 휠체어 때문에 가려지지 않도록 했다. 이 연극은 극본을 쓴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박진희씨가 드라마치료에 내담자료 참여하여 자기 이야기를 풀어낸 것을 기초로 상황과 대사를 구성한 것이었다. 이 극을 통해 그녀 삶의 역사를 알 수 있었는데, 특히 어린 진희가 공부를 하고 싶어서 들어갔던 S재활원 에서 받은 따돌림과 신체적, 언어적 학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결국 그곳을 나와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얻기까지 칠전팔기하며 검정고시에 도전했던 이야기와 취업문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 이야기 등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극의 말미에서는 그녀의 버킷리스트에서 채워지지 않은 것들, 예컨대 운전하기, 패러글라이딩하기, 춤추기, 엄마와 바다에 가기 등은 움직이는 무대 장치와 소품으로 구현했다. 관객들은 주인공의 꿈이 성취될 때마다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진희씨는 독립적이고 성숙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상처를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성숙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받은 언어 학대는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면 다시 생각하기도 싫을 만 한 내용들이었다. 신체적인 장애가 없이도 자기 속에 갇혀서 미숙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사는 성인들이 많은 것을 생각해보면 진희씨의 삶은 존경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진희씨가 너무 자랑스러워서 극이 끝난 후 앞으로 가서 인사하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그날은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었다.  


    『후아유』를 읽으며 연극을 관람했던 날의 감격이 떠올랐다. 재활원 사람들과 구인 업체는 진희씨를 장애인으로만 대했지만 정작 본인은 자신의 장애에 매이지 않았다. “한국 사회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 민감하도록 가르쳤건만,” 진희씨는 그 시선을 믿지 않았다.  어머니와 언니 오빠의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진희씨의 영혼을 굳건하게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같다. 

    나는 집단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얼마나 인간으로 대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아직 같길이 멀다. 사람을 노동력으로만 보는 것이 나쁘듯,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만 보는 것도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동네에서 자주 마주치는 외국인 학생들이 떠올랐다. 주로 약소국가 출신인 그들을 나와 동등한 주민으로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저자가 영국에 살 때 서점에 첼로 악보를 사러 간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 그녀는 점원이 자기에게 첼로를 연주하는지, 아니면 가르치는지 물어봐준 것에 감격한다. 우리가 소수집단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작은 팁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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