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부작용에 시달리다
벨케이드 3차 사이클을 마치고 대전으로 내려온 후 부득이하게 외출할 일이 많았는데, 찬 바람을 쐰 탓에 그만 감기에 걸려버렸다. 열이 높아서 폐렴인 줄 알고 식겁을 했지만, 다행히 폐렴은 아니었다.
고용량 항암제의 후유증은 벨케이드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지러움과 오심으로부터 시작하여 내 몸이 땅바닥에 딱 붙어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혈압이 떨어질 때 느껴지는 증상인 것 같았다.
게다가 체온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통에 옷은 금방 땀에 젖었고, 땀에 젖은 옷을 벗을 기운이 없어서 차가운 옷을 입고 떨어야 했다. 매번 엄마의 도움을 구할 수가 없어서 나름대로 생각해낸 방법이 수건을 옷 대신 입는 것이었다. 수건을 둘둘 감고 있다가 땀에 젖으면 수건을 빼버리고 새 수건을 감으면 되었다.
탈모에 대비해서 미리 머리를 깎았는데도 짧은 머리털까지 남김없이 다 빠져버렸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24일 토요일
오늘은 컨디션이 최상이다.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박쥐>를 시청했다. 말기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지 못해 무력함을 느낀 가톨릭 사제가 불치병 치료제 개발을 위한 생체실험에 지원한 후 병에 걸려 죽게 되지만 뱀파이어의 혈액을 수혈받고 다시 살아난다. 그 후 그에게는 병 고치는 능력과 강한 체력이 생겼으나 정기적으로 인간의 피를 흡입하지 않으면 다시 그 병의 증상이 재발된다.
그러는 와중에 신부는 친구의 아내와 성관계를 맺음으로써 그녀까지 뱀파이어로 만든다. 여전히 인간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신부와 달리 친구의 아내는 살인을 예사로 하는 바람에 신부는 살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죽음을 택한다. 떠오르는 아침해 앞에서 까만 숯으로 변하는 이 순간 신부는 “지옥에서 만나자”라고 말하고 여자는 “죽으면 끝이야”라고 말한다.
사후의 심판에 대해선 신부가 더 큰 두려움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더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몸의 죽음을 택한다. 사람을 살려보려 했던 신부의 소망은 결국 한 사람이라도 덜 죽게 하려는 소망으로 바뀌었다.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신의 영역이니 인간이 거기 도전하지 말라는 것이었까?
일기 발췌_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어젯밤에 39도가 넘는 고열이 났다. 주일예배 참석, 예솔이의 미술대회 동행, 아파트 사전 점검이라는 만만찮은 활동을 연달아 했으니 건강한 사람도 병이 날 만했다. 여차하면 서울로 달려 올라갈 각오를 했으나 다행히 야간 당직 병원에 가서 소염제 주사를 맞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목감기가 원인인 것 같았다.
오늘 전문 간호사와 통화가 되어 물어보니 약을 먹고 치료하되 또 열이 오르면 재차 그 병원에 가서 항생제 처방을 받으라고 하였다. 가장 걱정되는 일은 폐렴이니 엑스레이도 찍어보라고 하였다. 그 얘길 들으니 만약의 경우 어떻게 대처하면 될지 알게 된 셈이라 안심했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27일 화요일
새벽 3시, 체온은 37도 4부, 기침과 짙은 녹색 가래.
컴퓨터로 검색해 보니 폐렴은 어린이, 노인, 면역기능이 약한 사람이 걸리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나와 있었다. 진단을 위해서는 흉부 엑스레이를 찍은 후 이상이 보이면 침과 혈액을 채취하여 원인 미생물을 찾는다고 헸다. 치료를 위해서는 적당한 항생제를 투여하고 필요시 입원과 물리치료도 하는 것으로 나와 있었다.
서울 성모병원에 내원하였다. 오전에 대전 계룡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었을 때 폐렴은 아니나 서울로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소견을 주었기 때문이다. 민교수는 폐렴이 아니고 목감기에 걸린 것이라며 약을 처방해 주며 푹 쉬라고 하였다. 친정에서 하루 쉬고 내일 대전에 내려갈 것이다.
일기 발췌_2010년 5월 4일 화요일
골수검사와 중심 정맥관 삽입 시술을 했다. 시간이 갈수록 마취가 깨면서 통증이 심해졌다. 골수검사 결과는 다음 주 화요일에 나온다고 한다. 혈액 속에는 암세포가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골수 속에도 없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라고 했다. 골수도 깨끗하다는 결과가 나오면 이식수술을 할 수 있는데, 이식수술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 썼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항암제를 써서 골수를 정화한 후에 조혈모세포를 채집하고, 그 후 나의 골수세포를 완전히 빼내고, 그 자리에 새 골수를 채워 넣을 거라고 한다. 그 과정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은 부작용을 수반하고 면역력 약화로 감염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3주간 무균실에 격리 수용된다고 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담을 읽어보며 “난 할 수 있어!”라고 구호를 외쳐보지만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기 발췌_2010년 5월 5일 수요일
대전에 왔다. 하는 일 없이 TV만 보고 있자니 나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져 빨래를 걷어 개고 베갯잇을 씌우고 예솔이에게 영어공부를 시키고 하니 기운이 쏙 빠져버렸다. 진통제 때문에 마비증세가 살짝 오고 다리와 발이 저린다. 일주일 동안 샤워를 하면 안 되는데 땀은 왜 이렇게 많이 나는지 모르겠다.
일기 발췌_2010년 5월 6일 목요일
왼손이 부어서 엄지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는다. 어젯밤에는 다리 저림이 심하고 손 떨림 현상까지 있었다. 아침에 전문 간호사에게 전화하여 물어보니 말초 신경염 때문이라며 처방약에 신경염 치료제가 들어갔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정 힘들면 진통제를 더 쓰라고 했다.
여전히 다리는 저리고 시큰거리는데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노랫소리 덕분에 나의 통증을 잠시 잊는다. 아름다움은 고통을 이기게 하는구나!
일기 발췌_2010년 5월 18일 화요일 고용량 항암
아침 8시에 서울성모병원에 도착, 입원 전 검사를 마치고 주사실로 향했다. 고용량 항암주사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견딜 만했다. 어지러움과 약간의 오심만 느껴졌다. 그런데 친정집에 와서부터가 문제였다. 어떤 자세로 누워도 편하지가 않고 어떤 채널을 보아도 속이 메슥거렸다.
목구멍으로 뭔가가 넘어오기 직전인데 설상가상으로 엄마가 일껏 준비한 밥을 먹지 않는다며 책망하는 아버지의 말이 정신적인 고통까지 유발하였다. 몸과 마음이 최악이었다. 입맛이 없어도 엄마 정성을 생각하여 먹으라는 아빠에게 입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토하기 일보직전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그런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왼쪽을 향해 웅크리고 누우니 잠이 좀 왔다. 중간에 남편의 전화를 받느라 한 번 깨고 두 번째로 잠들고 일어나니 아직 정오가 안 된 시간이었다.
일기 발췌_2010년 5월 21일 금요일
고용량 항암주사를 맞은 지 나흘째다. 후유증이 사나흘 간다고 했다.
오늘 아침엔 독립문 공원을 산책했다. 닫힌 방안에만 있다가 싱그러운 나무 향을 맡으니 온몸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구역질도 덜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임신했을 때 입덧을 가라앉히기 위해 신 것을 먹었던 것이 생각 나 레모네이드를 하나 사 먹었더니 몸에서 잘 받았다.
3일간의 연휴를 앞두고 남편과 예은이, 예솔이가 올라왔다. 처음에 예솔이는 엄마의 짧은 머리와 몇 겹으로 껴 입은 옷, 농사꾼처럼 동여맨 수건을 낯설어하더니 금세 익숙해진 모양이다. 예솔이의 웃음소리와 재롱이 반찬이자 원기회복제가 되어 도무지 당기지 않던 밥도 먹고 한참을 앉아서 게임을 하고 놀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