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해가 되었다!
원래 계획은 벨케이드 주사를 네 번째 사이클까지 맞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총 16회를 맞은 후에 M 단백 수치가 떨어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그렇지 못하면 또 한 사이클을 더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사이클이 끝나기도 전에 민 교수로부터 M 단백 수치가 0.00이라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다지기’ 차원에서 4차 사이클까지 완료하겠다고 했던 민 교수는 3차 사이클이 끝날 때쯤 마음을 바꾸어 4차를 생략하자고 했다. 우리는 뜻밖의 선물을 받아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16일 금요일 (벨케이드 3-2)
M 단백 수치가 0.00이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18일 일요일
목요일 새벽부터 시작된 예솔이의 열감기가 떨어지지 않아서 오늘까지 유치원, 발레, 꿈꾸는 마을을 결석했다. 아이는 왼쪽 팔이 아프다고 한다. 그밖에 다른 통증은 없지만 짜증이 많이 늘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엄마랑 목욕하면서 수다 떠는 거야.” 말을 아끼는 아이가 열애 들떠 한 말이다. 이런 아이가 엄마 없이 스무날씩, 열흘씩을 지내왔다는 걸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나는 인간관계 맺는 데 서툴러서 인간관계도 글로 배우려 든다. 지금 내 침대 옆에 놓인 책은 성경, 『나는 이렇게 나이 들고 싶다』, 『눈뜬 자들의 도시』, 『상담과 공동체』, 『월든』, 『울지 마, 죽지 마, 사랑할 거야』다. 모두 다 좋은 책들이다. 다양한 관점을 갖게 해 주고 외로움도 잊게 해 준다. 언제까지나 책이라는 창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다행스럽겠으나 아야코의 말처럼 시력이 감퇴하는 그날이 오면 어쩔 것인가? 목소리와 스킨십으로 사람들과 접촉하는 법도 배워두어야 할 텐데….
오늘은 성경을 읽은 후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기도를 하려고 했지만 기도가 잘 되지 않았다. 기도가 아닌 사고의 연장이 될 뿐이었다. 그동안 기도한다고 앉아 있을 때에도 나는 하나님과 대화한다기보다는 사색만 계속해왔던 것 같다. 최근 성경을 정독하고 매일 예배드리면서 기도에 조금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소설 - 특히 정치적 관점을 가진 소설 - 을 읽을 때마다 영적 레이더가 심히 차단되는 것을 느낀다.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변비에 대한 자구책으로 듈코락스 S를 먹고 일찍 자보려 했으나 독서의 순서가 문제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문제인지 기도도 안 되고 잠도 들지 않아서 다시 일어났다. 『상담과 공동체』를 읽어보아야겠다.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죽기 전에 “나는 아직도 할 말이 너무 많다”라고 했다 한다. 죽음 앞에서도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허망한 삶일까? 나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에 연연했던 나는 그 누구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기는 것을 완수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는 가정 하에 적어도 자신과 그 누군가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을 찾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가. 내가 이루지 못하고 가는 일을 나의 후대 사람이 이룬다면 공동체의 관점과 역사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이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20일 화요일 (벨케이드 3-3)
오늘 주사 후 다리와 발 저림이 심하다. 항암제가 정상세포까지 공격하여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형질세포는 점점 감소하고 있으나 항체 생성 능력도 같은 속도로 떨어지고 있고, 따라서 백혈구는 바이러스와 세균의 공격에 취약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내 골수 속의 백혈구는 그야말로 무기 없는 병사가 된 셈으로 다른 장기 속의 백혈구와 혈소판의 기능을 지원해주지 못하고 있다. 손과 발 저림은 혈행이 원활하지 못함은 말해주는 증상일 것이다. 벨케이드 4차 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내 몸이 잘 버텨주면 좋겠다.
민창기 교수는 '다지기' 차원에서 4차 사이클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붓기가 심해서 4차 때는 스테로이드를 쓰지 않겠다고 했다. 조혈모세포 채취를 위해서라도 골수를 최대한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골수이식을 하기 직전에 면역기능이 완전히 떨어진다는데 그때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지 참으로 두렵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22일 목요일
CGNTV <지성과 영성의 대화> 시간에 이어령 교수와 이재철 목사가 출연하였다. 가족을 주제로 한 대담이었는데, 가족은 피의 교환이며 물질의 교환, 언어의 교환이 일어나는 장소라는 말이 주의를 끌었다. 이 중에서 어떤 교환을 가장 우위에 두느냐에 따라 가족의 건강이 결정된다고 하였다. 경제적 교환이 기본 조건이겠으나 그것은 최소한의 생존과 보호를 위한 것이 되어야지 잉여물을 축적하여 타인에게 과시하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재물이 세상과의 소통을 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23일 금요일
민창기 교수가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항암제 반응이 좋으니 벨케이드는 3차로 끝내고 이식 준비를 하자는 것이었다. 지난 화요일엔 신중한 태도를 보이시더니만 생각이 바뀌셨다. 5월 4일 외래에 올 때는 골수검사를 하고 중심 정맥관을 삽입하자고 하셨다. 나로선 신나는 일이다. 이식이라는 과정의 고통을 들어서 알기에 그 순간을 일찍 맞이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거쳐야 할 일이라면 빨리 거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