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늙는 것이 슬프고 내가 아픈 것이 미안하다
나는 부모님의 정성 어린 돌봄을 받는 와중에도 그분들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아내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속이 한없이 좁아져서 남편에게도 서운함을 자주 느꼈다.
노인의 관심은 한정된 시야에 갇혀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특히 내 아버지는 한 사람이나 하나의 사건에 집착하여 특정 사고와 행동을 끊임없이 반복하였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태엽을 감은 기계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시간 순서대로 일어나야 할 일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지시하고 당부했다. 그리고 당신의 이해 밖에 있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것이 무엇인지, 왜 그런지 물었다. 천안함 피격사건이 일어난 후로는 “큰일이다, 큰일이다, 망신이다, 망신이다”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
엄마의 경우 양상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말이 반복된다는 점에서는 유사했다. 엄마의 말씀은 가르침이나 지시, 명령이 아니면 자화자찬이었다.
노인들의 이런 특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노인의 사고는 젊은이의 사고를 제한하고 창조성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맥락에서 예솔이를 병든 나와 함께 있게 하는 것이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 풀벌레 가득한 벌판을 뛰어다녔고 바다에서 헤엄치고 고동과 게를 잡으며 놀았다. 시골 할머니 댁 평상 위에 누워 별을 보았던 날도 많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는 자연 속에서 뛰어논 추억을 별로 만들어주지 못했다. 미래는 아이들의 것이 되어야 하건만 우리 집 생활은 노인과 환자 위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8일 목요일
오늘은 남편이 골프를 치러 간다고 하였다. 4월이니 다시 골프 시즌이 시작되는 것이다. 난 아파 누워있어도 자기는 즐기는구나 싶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속을 끓이다가 저녁에 내가 소그룹 리더 K 집사님과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남편이 물었다. 그것이 그리 섭섭했냐고. 남편은 다른 골프 요청을 어렵사리 거절하고 사업상 꼭 필요한 것만 남겨놓았던 것이며, 사람들에게 아내가 암 환자라는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속 좁게 구는 내가 남편은 야속했을 것이다. 아침밥도 차려주고 저녁에는 손발도 주물러주며 하루에 한 번 전화해서 어떤지 물어주는 남편이다. 난 남편이 잘하는 것은 놔두고 잘못하는 것만 지적하는 모자란 여자였다.
남편에 대한 미움이 몰려와 그것을 표현할 때마다 내가 남편을 실제보다 악하고 냉정하고 무자비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남편에게도 착하고 따뜻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분명 있는데 본인은 그걸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나는 그걸 잘 찾지 못한다.
문제는 내 생각의 끝이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남편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처럼 부어터지고 뚱뚱하고 병든 여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기가 막힌 결론이다. 결코 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아닌데도 나는 이런 이야기로 끝을 맺으려 한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9일 금요일
새벽에 열이 39도까지 올랐다가 아침에는 내렸다. 어제와 그제 너무 무리하였나 보다.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끼고 싶어서 집 밖으로 나갔더니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 목련, 매화, 벚꽃들이 꽃 대궐을 이루고 있었다. 꽃들의 합창을 뒤로하고 집에 오기가 싫어서 한참을 밖에 있다가 대추야자를 옮겨 심을 큰 화분을 사 와서 분갈이까지 했다.
오늘은 청주의 S가 전화를 주었다. 그렇게도 열망하던 청주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한다. 본인이 신성회를 통해 큰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혜택을 누리게 돕고자 하는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스스로 배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모임을 선뜻 시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진실한 성품과 훌륭한 언변을 가진 사람이라 설교자나 상담자로 쓰임 받기에 손색이 없다. 이런 사람을 발굴하여 리더로 세우는 것도 신성회가 할 수 있는 특별한 사역이다. 그녀는 너무 소중하고 신성회도 소중하다. 내일 신성회 20주년 행사에서 보기로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10일 토요일
오늘은 열이 완전히 내렸다. 신성회 20주년 행사에 잠깐 들렀다가 예솔이를 발레학원에 데려갔다 온 후 서울에 가기로 했다.
신성회 20주년 행사에는 연말 행사 때와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직장반에서는 나까지 4명이 참석했다. 처음부터 함께했던 멤버들, 그만큼 오래된 회원들, 그리고 새로운 열성 회원들을 만났다. 이들을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함께이게 하는 것이 책 때문만은 아니다. 부끄러운 것까지 나누는 진심의 대화 때문이다.
작년에 예진이가 사다 놓은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세상이 눈먼 사람으로 가득 찼을 때 그들이 짐승처럼 되고 양심이나 수치심이 사라져 가는 이야기였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12일 화요일 (벨케이드 3-1)
이번엔 주사 후 몸이 좀 더 깔아진다. 변비가 심하여 다음 주사를 맞기 전에 관장을 하고 가야겠다 생각했는데, 낮에 커피를 한 잔 마셨더니 상당량의 대변이 나왔다.
일기 발췌_2010년 4월 13일 수요일
도서관에서 신경숙의 장편소설 『바이올렛』과 단편소설집 『강물이 될 때까지』를 빌려왔다. 신경숙의 작품은 언제나 깊은 슬픔을 바탕에 깔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모종의 결핍을 가진 사람들로 스토리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바이올렛』의 주인공 역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끊임없는 갈등을 견디지 못하여 집 밖으로 돌다가 비슷한 환경의 사는 친구에게 우정, 가족애, 성적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다. 슬프게도 둘의 우정 또는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주인공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성경 예레미야서를 읽는 중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에 대해 계속 말씀하신다. 그들의 거짓말과 속임, 배신에 대해 분노하신다. 신경숙의 작품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한없는 연민을 느끼다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글을 읽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나님은 왜 화를 내시는가? 인간은 이렇게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이건만. 나도 하나님에게 화가 나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나님은 그 악한 자들에게 분노하시는 것일 터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