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환우들을 보며 눈물짓다
벨케이드 주사는 주 2회씩 2주 맞고 한 주를 쉰 후 다시 주 2회씩 2주 맞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주사 맞는 날은 외래 진료실에 가는 대신 주사실로 바로 가서 번호표를 받았다. 주사실 이용은 당일 입원으로 처리되었으므로 매번 입원 절차를 밟았다.
내 차례가 되어 침상이 배정되면 간호사가 와서 링거 팩을 달고 주삿바늘을 혈관에 꽂았다. 잠시 후 다른 간호사가 와서 항암제 팩을 달고 링거 줄 중간에 항암제 주사 바늘을 꽂았다. 약을 아주 천천히 주입했기 때문에 1회분을 다 맞기까지 약 6시간이 걸렸다. 주사를 맞는 도중에 외래에서 부르면 주삿줄을 이동식 거치대에 매달고 민 교수 방에 가서 면담을 했다.
주사실 침상은 칸막이 커튼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다른 침상에서 나는 소리가 다 들렸다. 그 방에는 어린 혈액암 환자들도 많았다. 아직 말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울기만 했고, 조금 큰 아이들은 대체로 잘 참아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지루한 시간을 메우기 위해 그림을 그리고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짐짓 명랑을 가장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나는 오십 년 가까이 살았으니 이제 죽어도 그다지 억울할 것 없었으나 어린아이들이 몹쓸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벨케이드 주사의 첫 번째 사이클은 3월 12일에 끝났고, 3월 23일부터 두 번째 사이클이 시작되었다. 약의 후유증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아서 나는 간간이 외출도 하고 손님도 만날 수 있었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19일 금요일
목이 살짝 붓고 머리가 띵하다. 어제 잠시 외출하여 찬 바람 쐰 것이 문제가 되었을까?
일기 발췌_2010년 3월 20일 토요일
독서 모임에 나갔다. 광주의 J사모가 오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아이는 세상에서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J사모는 커다란 목소리로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려하였다. 그녀의 큰 목소리와 끊임없는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원인을 말하긴 어려워도 그 결과를 알 순 있다. 아들의 침묵이 그것이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21일 일요일
어제 독서 모임에 오래 앉아있어서인지 허리와 엉덩이뼈가 아프다. 체중이 너무 많이 늘어서 오늘 아침은 고구마와 과일을 먹었다.
주일 예배 설교는 새로 부임한 김윤호 목사님이 하셨다. 그릇이 존재하는 이유는 음식이나 물건을 담기 위함이듯 사람은 비전을 담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말씀이었다. 나의 비전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나는 ‘화평케 하는 자’로서의 꿈을 말하였다.
내가 화평에 집착하는 이유는 싸움과 갈등을 싫어하는 성격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심리상담가로서 나의 역할이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고 미움을 이해로, 닫힌 마음을 용서로 바꾸는 일이라고 믿으며 열심히 일했는데 내담자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 자신도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혐오로 사람들을 밀쳐내면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 나는 자격 없는 자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이 일을 해야 한다. 어떤 일에 가치를 두고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큰 차이를 만든다.
일기 발췌_2010년 3월 23일 화요일 (벨케이드 2-1)
일기 발췌_2010년 3월 24일 수요일
다시 친정에서의 생활이다. 이번엔 예솔이가 더 그립다. 처음으로 혼자 유치원 버스 타러 가는 모습, 엄마가 있어도 아빠랑 자러 가는 모습이 의젓하면서도 짠했었다. 내 옆에서 책 보고 그림 그리고 이야기할 때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어제 아침엔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징징댔다 한다. 내가 바쁘게 살 때는 아이들의 작은 상심을 읽을 겨를이 없었다. 내 일정이 우선이고 아이들의 문제에는 이성적으로만 대처했다. 예은이와 예진이 둘 다 내 삶에서 제일의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했다. 예은이가 어릴 때는 교회가, 예진이가 어릴 때는 교회일에 더하여 피아노 레슨과 공부가 우선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짧은 순간이라도 “엄마에게는 네가 가장 소중하단다.”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필요했건만.
예진이가 일본에 간 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극도의 체력 저하를 느꼈다고 한다. 잠도 잘 못 잔다고 했다. 지난 설에 왔을 때는 9kg을 뺐다고 자랑하더니만. 분명 영양부족이 수면 부족을 낳았을 것이고 잠을 못 자니 피로가 풀리지 않는 것이다. 밥 세끼 챙겨 먹고 일찍 자라고 했더니 그렇게 한다고는 했지만, 몸이 더 상할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