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빠의 딸로 태어난 것은 행운이라 여겼지만 맏이로 태어난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녀라는 이유로 동생들의 잘못은 모두 내게 전가되었다. 동생들이 말썽을 피워도 혼나는 건 나였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엄마에게 혼날 때마다 우리 엄마는 계모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눈물을 삼켰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자녀 훈육의 正道인 줄 알았다. 자라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의 부모는 아이가 명백한 잘못을 했다 해도 동생들 앞에서 언니를 혼내지 않았다고 했다. 언니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이 더 교육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나의 세계에서 진리였던 것이 다른 사람의 세계에서는 오류였음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귀가 울렁증이 시작될 무렵 서울에 사는 이종사촌언니의 안부전화를 받았다. 나도 모르게 언니에게 하소연을 했다. 그동안은 열 살 위의 사촌언니에 대해 심적으로 거리를 두었었다. 나도 엄마처럼 자존심이 강했던 거다. 가까운 친척이라 해도 우리 집안의 문제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우리 가족이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엄마의 태도가 싫으면서도 나는 엄마와 비슷한 태도로 친척들을 대해 왔었다.
기댈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던 나는 언니에게 요즘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네가 많이 힘들었구나, 라는 언니의 말을 들으니 억눌렀던 분노와 서러움이 밀려왔다. 언니의 엄마인 큰이모는 우리 엄마와 성격이 많이 닮은 분이었는데, 언니는 큰이모 말년에 집에서 이모를 모셨었다. 이모 생전에 언니가 그렇게 힘들어한 것을 나는 몰랐었다. 아빠와 엄마 때문에 힘든 것을 이야기하니 언니도 자기 엄마 때문에 애 먹었던 이야기를 하며 나에게 깊이 공감해주었다.
사촌 언니와 동생이 자기들의 엄마를 성토하면서 위안을 받는 것이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방법 말고는 위로받을 길이 없었다. 엄마에게 화나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을 언니에게 다 일러바치니 속이 시원하였다. 그 순간 나의 지원군이 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분이신 삼촌과 두 명의 이모들, 그리고 두 명의 이종사촌 언니들이 나의 지원군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한 지원군이냐고? 엄마와의 전쟁을 위해 지원군이 필요했다. 엄마는 핑계와 합리화의 달인이라 정공법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아빠를 돌보는 최선의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가족 모두가 자신의 입장과 생각, 감정을 솔직히 나누어야 한다. 그러나 엄마는 자신의 결론을 먼저 정해놓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증거들만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와 일대일로 이야기할 때는 엄마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나서 이야기를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에 있는 남동생에게 한 번 왔다 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부모님이 오지 말라고 했다는 핑계로 동생은 5년 동안 한 번도 오지 않았다. 동생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는 말을 들은 후 동생이 와 있을 동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좋을지 고민했다. 동생은 그동안 부모님과는 가끔 소통하며 지냈지만 나와는 거의 소통이 없었다. 부모를 모시기는커녕 부모의 짐이 되고 있는 동생은 누나와 여동생에게 면목이 없을 것이었다. 나는 동생이 부모님의 몰이해와 강압에 의해 멀리 도망가 있는 것을 이해했지만 자식의 의무까지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괘씸하게 여기고 있었다. 잘못하다간 동생의 방문길이 집안싸움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는 지원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생이 와 있는 동안 하루를 잡아 함께 호텔에서 묵으며 친목과 대화의 시간을 갖자고. 비용은 나와 여동생이 부담하기로 했다. 온천을 좋아하는 분들인지라 유성온천에 방을 잡았다. 아빠의 컨디션이 널뛰듯 불안정했지만 예약한 날짜에는 호텔에 모시고 갈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더욱이 아빠는 동생이 오니까 심리적으로 크게 안정이 되셨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에 모였을 때 친척 중 누군가가 앞으로 아빠를 어떻게 모실 계획이냐고 물었다. 엄마는 별일 아닌 듯이 지금은 상태가 좋으시니까 안 좋아지면 그때 가서 생각한다고 하였다. 아빠의 상태에 따라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던 지금까지의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을 다시 하겠다는 뜻이었다. 순간 울화가 치밀었다. 엄마의 그 말에는 딸이 옆에 있으니까 일이 생길 때마다 딸을 부르면 된다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나는 모두가 있는 앞에서 말했다. 나 너무 힘들어요, 계속 이런 식으로는 못하겠어요, 라고.
이종사촌 언니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자고 하면서 집에서 간병인을 쓰는 자기 친구의 사례를 이야기했다. 지금처럼 병원을 들락거리다 보면 이모도 병이 난다, 최대한 집에 계시면서 다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것이 아빠에게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집에 계신다 해도 밤에 화장실 가다 또 넘어지시면 그때는 마지막이다, 그러니 집으로 오는 간병인을 쓰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예상했던 대로 아직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다, 집으로 오는 간병인을 어디서 구하겠느냐, 왜 이렇게 우울한 얘기만 하느냐면서 화제를 돌리려고 하였다. 나는 다시 한번 눈물로 호소했다. 나는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누가 나를 불효 막심한 딸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다고 나를 비난한다 해도 할 수 없었다. 엄마의 전화받기가 무섭고 아빠의 끝없는 장례식 이야기를 듣다가 돌아버리기 직전이었으니까.
엄마는 백 번 양보하는 듯 야간에만 간병인을 쓰겠다고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신 말이니 쉽게 번복하지는 않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모두들 간병인 구하는데 협조하겠다고 약속했다.
남동생은 평생 해야 할 효도를 일주일 동안 다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툭하면 짜증을 내고 부모님에게 불손하기가 이를 데 없었는데 이번에 와서는 두 분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온순했다. 아버지에게 진심 어린 사과도 했다. 그것을 보니 나도 저절로 용서가 되었다. 15년 전까지 동생의 삶은 전쟁과 같았다. 치과 운영에 간섭하는 부모님과 사사건건 부딪치자 치과 문을 닫고 종합병원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치과 개업하기를 반복했었다. 코이카에 지원하여 봉사활동을 다녀오기도 하였는데 동료들과 잘 지내지 못하여 다시 돌아왔다. 동생은 평생 도망 다니는 인생을 산 셈이다. 결국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가 되겠다고 미국으로 떠나서는 15년째 돌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박사학위 과정은 시작도 못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대학에서 만년 조교를 하고 있다.
동생의 피곤한 삶을 어느 정도는 이해했기에 미운 마음보다 연민의 마음이 더 컸다. 동생은 미국에서는 한국처럼 쫓기는 삶을 살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고 했다. 마음 여린 동생은 한국사회의 경쟁과 부모님의 성화를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부모님께 효도를 할 기회를 가진 덕분에 동생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