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이야기 속에 산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아빠는 아빠의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엄마의 이야기를 한다. 나에게는 나만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부모가 써 준 이야기가 아닌 내가 쓴 이야기 말이다. 어찌 보면 그 사람은 자기가 한 이야기이다(You are what you say). 나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된다.
오늘도 아버지는 사망진단서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 이야기는 매번 조금씩 변주된다. 오늘의 이야기는 국립묘지 매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아빠는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고엽제 피해자이기 때문에 국립묘지에 매장될 수 있다고 늘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오늘은 사망원인에 따라 국립묘지에 매장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셨다. 자살이나 타살이 아니고 병사나 자연사라는 것을 의사가 증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살을 하면 국립묘지에서 안 받아주고 타살이라면 부검을 하고 수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장례식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영안실 비용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구십 노인이 돌아가셨는데 누가 자살이나 타살을 의심하겠느냐, 지병이 있었고 병원 진료기록이 있으니 병사나 자연사로 판단할 것이다, 아빠의 말에 일일이 대꾸를 하다 보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때가 많다.
아빠가 국립묘지에 그렇게 집착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립묘지에 묻히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 문제예요? 아빠는 하늘나라에 가실 건데. 그랬더니, 중요하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기 쉬워야 한다고 하신다. 아빠는 사람들이 자기를 잊을까 봐 두려운 것일까. 아빠의 비논리적인 사고와 감정 속에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공통된 사고와 감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이야기는 허공을 날던 민들레 씨앗처럼 의식 속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이야기는 허공을 날던 민들레 씨앗처럼 아빠의 의식 속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빠의 무의식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일 터이다. 어느 날은 또 장례식 절차에 대해 꼬치꼬치 물으셨다. 집례는 누가 하며 찬송가는 몇 장을 부를 거냐, 약력 소개는 어떻게 할 거냐고 하셨다. 사람들이 찾아오기 쉬우려면 대전에서 제일 큰 장례식장에서 해야 한다, 충*대학 병원이 제일 크니까 미리 가서 예약을 해 놓아야 한다 하셨다. 장례식장은 예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사망하는 순서대로 자리가 있으면 받아주고 없으면 안 받아준다 했더니 계속 그 이야길 하고 또 하면서 불안해하셨다. 하는 수 없이 장례식장 중에서 제일 큰 방을 달라고 하면 된다, 누구나 큰 방을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큰 방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안심하는 눈치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성대한 장례식을 하는 것이 아빠의 진짜 소망일까? 죽은 후에 당신의 인생 성적표가 장례식의 화려함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하시는 걸까? 아버지의 속내를 알기가 어렵다. 정신없는 노인네라고 치부하기에는 장례식에 대한 걱정과 대비가 너무나 일관되게 간절하다.
나는 아버지를 제대로 알고 싶다. 그러나 때때로 아버지 속에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아버지는 과거의 아버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격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의 망상적 논리 속에서 과거 아버지의 고집이 엿보일 때가 있다.
어느 날부터는 예금통장에 대한 걱정이 시작되었다. 당신이 사망하면 연금이 안 들어올 텐데 그러면 연금 통장에서 이체되는 관리비 등이 연체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본인이 죽는 마당에 그깟 연체료 몇 만 원 내는 것이 뭐 그리 큰일인가. 나는 아빠가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것이 정말 보기 싫다. 어려서 가난하게 살았다고 늙어 죽을 때까지 구차하게 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엄마 명의 통장을 개설해서 자동이체 계좌를 그 통장으로 바꾸면 된다고 했더니 알아들으시는 눈치다. 연금통장의 돈을 수시로 옮겨놓으면 된다고 말씀드렸다. 대충 대답하거나 짜증스럽게 대답하면 집요하게 반론을 제기하시기 때문에 본인이 납득될 때까지 설명을 해 드려야 한다.
보청기를 잃어버린 아빠는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더 짜증을 많이 내셨다. 청력장애 판정을 받으면 국가 지원금이 나온다고 하여 어렵사리 세 차례 검사를 하고 새로 보청기를 맞추어 드렸더니 곧 죽을 건데 보청기를 왜 만드느냐며 비협조적으로 나오셨다. 당신이 잘 들어야 될 일이 뭐가 있다고 돈을 쓰냐며. 텔레비전도 잘 볼 수 있고 전화소리도 잘 들을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끼리 얘기할 때도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리니 좀 납득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돈이 조금밖에 들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아빠는 쉰이 넘은 아들에게 지금도 생활비를 보내주신다. 동생은 돈 버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직업이 싫어서 그 일을 하지 않는다. 동생은 전직 치과의사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동생의 꿈을 묵살하고 의사의 길을 가라고 강요하셨다. 동생은 어렵사리 의사가 되었으나 마음이 여려 환자들의 불평을 감당하기 어려워했다. 최고의 치과의사였지만 백 명에 한 명 불만을 말하는 환자가 있으면 말도 못 하게 괴로워했다. 아빠는 동생의 괴로움을 이해하지 못하셨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데 그까짓 불평 좀 듣는 게 대수냐며.
동생은 병원을 떠나고 아버지를 떠났으며 이 나라도 떠났다. 아버지는 여전히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손자들의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경제적인 지원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에게는 젊어서 아끼고 아껴 모은 재산 약간과 다달이 나오는 군인연금이 있을 뿐이다.
신체적 동일성 외에 과거의 아빠와 지금의 아빠가 동일 인물임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의 선호가 아닐까? 그가 젊을 때 좋아하던 음식을 여전히 좋아하시고 젊을 때 좋아하던 음악을 여전히 좋아하시는 것을 보면 아빠는 분명 옛날의 그 아빠가 맞는 것 같다. 먼 옛날에 대한 아빠의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다. 이것도 그가 나의 아빠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장례식 걱정을 하는 아빠는 나의 아빠가 맞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