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정말 사랑이 많은 분이었다. 엄마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사랑하셨다. 그중에서도 맏이인 나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엄마 역시 나를 과잉보호하셨다. 시간이 가면서 나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부모님의 관심이 점차 간섭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는 청소년기에 부모님은 나를 한층 더 심하게 단속하려 들었고 그럴수록 나의 반감은 커졌다. 나에게 오는 편지를 모두 검열했고 외출하고 돌아오면 어디 가서 무엇을 했는지 다 고해바쳐야 했다. 부모님이 나에 대해 알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감추는 것이 더 많아졌다.
부모님은 당신들 기준에서 위험하게 보이지 않는 한 나를 내버려 두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동선이나 생각이 노출되지 않도록 말을 아꼈다. 나의 친구관계를 일일이 간섭했기에 집에 친구를 데려올 수도 없었다. 방학에는 늦게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했다. 부모님이 묻지 않는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이렇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나에게 책은 유일한 벗이 되어 주었다.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거나 피아노를 치고 있는 한은 잔소리 들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혼자만의 활동을 즐겼고, 그러다보니 안 그래도 내향적인 성격은 점점 더 비사교적이 되어갔다.
대학생이 되고 심지어 결혼을 한 후에도 부모님의 관심은 식을 줄 몰랐다. 나의 부모는 사랑을 준만큼 돌려받기를 원했고 나에 대해 관심이 많은 만큼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통제하고자 했다. 두 분의 사랑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익애. 내 부모는 익애를 퍼부은 분들이었다. 본인들이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당신의 자녀에게는 주고 싶었던 것이다. 친할아버지는 가난하고 무식해서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고, 먹고살 만했던 외할아버지는 외도를 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말과 표정과 온몸으로 사랑을 표현하셨고 엄마는 의식주의 필요를 채워주는 노동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아버지는 천성적으로 다정한 분인데다 그런 성격이 책임감과 결합하여 가족들이 생활에서 어떠한 어려움도 겪지 않게 하려고 애쓰셨다. 아빠는 우리에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아침 등굣길에는 버스 타는 곳까지 차를 태워주셨다. 여름에는 바다에도 자주 데리고 가셨다. 우리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 집을 방문할 때도 음식이나 잠자리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도록 하셨다. 언제나 아버지가 우리를 기다렸지 우리가 아버지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 같은 건 아예 만들지 않으셨다. 우리가 돌아올 때면 멀리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그렇게 하셨다. 자식이 조금의 불편함도 겪지 않게 하는 것이 아빠의 목표였다.
그러나 이렇게 돌봄을 받기만 하고 제대로 된 훈육을 받지 못했던 우리 형제들은 성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공부하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가부장적인 남편을 만나 살림 못한다는 구박을 많이 받았다.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관이 생기고 집 안팎에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집안의 귀염둥이였던 나의 여동생도 결혼생활을 통해 만만치 않은 훈련을 받았지만 지금은 충실한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해내고 있다. 치과의사였던 남동생은 불평하는 환자들에게 단련을 받으며 성장할 기회가 있었지만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진짜 삶으로부터 도망쳤다.
내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지나친 사랑이 부담스러웠다고 하면 복에 겨워서 그런다고 하였다. 사랑의 결핍 이상으로 사랑의 과잉도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는 내 부모로부터 건강한 부모상을 배우지 못하여 내 딸들을 키우는데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나 또한 주는 사랑만 알았지 거두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 믿어주는 사랑을 할 줄 몰랐다.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도널드 W. 위니컷은 충분히 좋은 부모 노릇에 대해 이야기한다. 충분히 좋은(good enough) 부모란 아이의 모든 욕구를 채워주는 부모가 아니라 적절한 좌절(optimal frustration)을 허용하는 부모이다. 나의 부모는 자녀들이 심리적인 이유를 할 시기가 된 후에도 계속적으로 우리를 젖먹이처럼 다루었다. 사랑도 지나치면 병이 된다는 말이 우리 가족에게 해당되는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부모님께 살짝 비추면 너희에게 잘해준 것이 잘못이란 말이냐, 라고 서러워하신다. 다른 식으로 사는 방법을 몰랐던 나의 부모이다.
아버지의 사랑은 고갈되는 법이 없다. 지금도 아버지는 엄마를 아기 다루듯 하신다. 엄마가 힘들까 봐, 엄마가 잠 못 잘 까 봐, 엄마가 배고플까 봐 걱정을 하신다. 게다가 당신이 집에서 죽으면 엄마가 놀랄까 봐 걱정이시다. 아빠가 운전을 하실 때는 엄마가 어딜 가자고 하든지 태우고 다니셨다. 아빠가 운전을 못하게 되자 엄마는 두 다리를 잃은 사람처럼 되었다. 엄마는 부지런한 사람이라 운전기사 노릇하는 사람이 없다고 가만히 계시지는 않았다. 가까운 재래시장에서 값싼 물건을 사서 이고 지고 와서는 음식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보내는 것이 엄마의 낙이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의 어깨가 혹사당하였고 급기야는 회전 근개가 파열되었다.
아빠가 운전기사 겸 비서의 역할을 하실 때는 엄마에게 큰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아빠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지금은 진정한 의미에서 엄마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할 때가 되었다. 팔순의 엄마가 이제 와서 홀로서기를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아빠 대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고 그것이 나였다.
나는 애초에 부모님이 내려오시는 것을 반대했었지만 기왕지사 내려오시게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다. 두 분의 연세를 감안하면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한 것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사한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사시던 서울 현저동 집은 근 20년을 살아 익숙한 곳이고 주변 환경도 쾌적했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과 독립문공원이 근처에 있어서 녹지도 많았다. 아버지의 주치 병원인 세브란스병원과 적십자병원이 지척에 있고 영천시장까지 걸어서 갈 수 있는 이 집은 노인들이 살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부모님은 자식 옆에 오는 것이 더 마음 놓인다며 집을 팔고 대전으로 내려오신 것이다.
노인들 중에 우리 부모님만큼 모험심이 많은 분들도 드물 것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새롭고 낯선 것 투성이인데도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크셨다. 부모님은 아파트 단지의 구석구석을 알아가고 새로운 산책로를 발견할 때마다 기뻐하셨다. 목적지로 가는 대중교통 수단을 찾을 때마다 즐거워하셨다. 두 분은 옛날부터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좋아하셨다. 그러니까 그렇게 수십 번의 이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하는 부모님을 보는 것이 좋지만은 않았다. 이런 즐거움을 계속 만들어드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디를 모시고 가면 좋아하실까. 뭐를 사드리면 좋아하실까. 이런 생각을 매일 했다. 아빠가 주간보호센터에 잘 다니실 때만 해도 측은한 마음이 들어 주말에라도 좋은 곳에 모시고 가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센터 가기를 거부하시고 병원 순례를 시작하면서부터 아빠를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도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빠가 여기저기 아프다고 하시니 처음에는 걱정이 많이 되었다.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 적절한 치료를 해 드리고 싶어서 노심초사하였다. 그러나 병원에 가서는 자기 마음대로 입원시켜 달라, MRI 검사를 해 달라, 주사를 놓아 달라고 명령하는 모습은 의사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노망난 노인네로 생각하고 참는 것인지 몰라도 의사들은 화도 내지 않았다. 검사 결과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도 자꾸만 아프다고 하는 아빠의 말을 인내하며 끝까지 들어주었다.
아빠가 재벌도 아닌 평범한 노인이면서 자신을 특권층으로 여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병원에 갈 때도 응급실로 가야 빨리 조치를 취해준다며 119를 부르라고 성화였다. 다른 환자들이 조용히 의사를 기다리고 지루한 시간을 참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듯이 행동하는 아빠는 영락없는 왕자병 환자였다. 이 사람이 우리 아빠가 맞는 것일까? 잘못 걸려온 전화에도 상냥하게 응대하시고 상대가 미안해할까 봐 마음 쓰셨던 분이었다. 인간미 넘치는 다정한 아빠를 나는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었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아버지는 어디로 가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