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나는 엄마에게 혼나면 아빠를 부르며 울었다. 직업상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던 아버지는 엄마의 박해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피난처였다. 적어도 나의 상상 속에서는 그랬다. 나는 아빠의 따뜻한 미소를 떠올리며 엄마의 히스테리를 참아냈다.
바다 건너 멀리서 아빠가 보내주시는 생일카드를 펼칠라치면 가슴이 두근거리다 못해 따끔거렸다. 거기에는 '사랑한다', '예쁘다' 같은 지상에서 들어 본 적 없는 언어들이 적혀있었다. 아빠의 카드가 없었다면 나는 스스로 못생기고 미련한 아이라 믿고 살았을 것이다.
아빠가 사주신 손목시계와 세계 명곡 음악테이프는 아빠의 분신처럼 내 곁에 있었다.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아빠에게 자전거를 배우던 날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동생들은 신이 나서 자전거 뒤에서 깡충깡충 뛰어오고 있었고 나는 아빠가 손을 놓은 줄도 모르고 떨리는 발로 페달을 밟았다. 이미 나 혼자 균형을 잡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의 놀라움과 희열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빠는 해군 장교였다. 아빠가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시면 우리 가족은 아빠가 근무하는 전함에 놀러갔다. 온통 회색 페인트로 뒤덮인 거대한 쇳덩이 속에 수많은 미로와 작은 방들이 있었다. 군함 속에는 주방과 식당도 있고 차를 마시며 트럼프 놀이를 하는 방도 있었다. 뽀빠이 모자를 쓴 사병들이 아빠에게 경례를 할 때 나는 내가 높은 사람이 된 것 마냥 으쓱해졌었다.
군인가족들은 특별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아버지는 우리의 자랑이었다. 게다가 한국 해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예였다. 나라를 위한 희생에는 그에 따르는 특혜가 있었다. 주거와 의료를 나라에서 보장해주기 때문에 집 걱정이나 병원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 엄마는 투자 목적으로 집을 샀다. 자식들의 대학 등록금과 결혼자금 마련은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미남이었다. 아버지가 군복을 입고 미소 짓는 사진은 로버트 테일러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는 아빠 닮았다는 말 듣기를 좋아했다. 실제로 어렸을 때는 아빠를 빼닮았었다.
아빠는 음악을 좋아하여 나에게 피아노 교육을 시켰다.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피아노를 들여놓고 비싼 레슨비를 지불한 것은 문화적으로 박탈되었던 아빠의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아 목동’이나 ‘가고파’ 같은 노래를 하는 것이 아빠에겐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나는 아빠가 원할 때마다 피아노를 치는 것이 갈수록 지겨워지기 시작했지만 아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빠가 그토록 행복해하는데 딸이 따라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빠의 부모, 즉 나의 조부모는 아빠에게 잘 생긴 외모와 좋은 머리 밖에는 물려준 것이 없었다. 밭뙈기를 일구어 채소를 길렀던 할머니는 멀쩡한 채소만 골라서 시장에 내다 팔았고, 김치를 담아서 맛이 들 만하면 그 역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아버지는 제대로 익은 김치를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할머니 등에 업혀 시장 가는 길에 대궐 같은 집이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아빠는 “엄마, 우리도 이런 집 짓고 살자.” 라고 했다는 것을 할머니께 들었다.
아버지는 좋은 집을 짓고 맛있게 익은 김치를 먹기 위해 무섭게 노력하였다. 가난하고 무식한 부모에게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던 아빠는 중학교 때부터 부잣집 아이들에게 과외공부를 가르치며 학비를 마련했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에서 농사꾼 부모, 병든 형, 어린 동생과 뒤엉켜 지내는 것이 공부에 방해가 된다 생각하여 직접 오두막집을 짓고 거기서 생활했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던가 보다. 치매에 걸린 지금도 무엇이든 고칠 태세가 갖추어져 있다. 한 번은 한밤중에 기척 소리를 듣고 엄마가 자다가 깨어보니 아빠가 벽시계 배터리를 교체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빠는 고장 난 물건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뭐든 정상으로 만들어놓아야 직성이 풀린다.
아빠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절에 가난한 수재들에게는 사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로망이었다. 군복이 그처럼 잘 어울리는 아빠가 군인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관생도 제복을 입은 아빠가 한복을 곱게 입은 엄마와 연애하던 시절 찍은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어렸을 때 나는 엄마 아빠의 사진 앨범을 마르고 닳도록 보았다. 잘 생긴 엄마와 아빠가 인형 같은 나와 남동생을 안고 찍은 가족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무슨 로열패밀리라도 된 기분이었다.
고향에서 지내던 시절 우리는 주로 일본군의 관사를 개조한 목조 가옥에 살았다. 일본식 주택은 바닥에서 1미터 이상 올라간 곳에 마루가 있는 건물로, 거실을 빙 둘러가며 복도가 있고 방마다 커다란 오시레(벽장)가 있었다. 널찍한 마당에는 꽃도 많이 심었고 아빠가 월남에서 가져온 코코넛 나무도 자라고 있었다. 아빠가 꿈꾸던 멋진 집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해군기지로 사용되었던 도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계획도시였던 벚꽃의 도시 진해가 내 고향이다. 군항제 전야제에는 온 시내 아이들이 오색 등을 들고 연등행렬을 했다. 연등행렬을 할 때면 어두운 밤하늘을 배경으로 가로등 빛을 받은 벚꽃들이 흰 구름처럼 떠 있었다.
아버지는 로맨티시스트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시골학교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엄마는 도심에서 전학 온 아빠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무척 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빠를 적수로 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빠는 엄마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엄마의 언니인 나의 큰 이모가 그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아빠는 선생님을 뵈러 간다는 핑계로 엄마의 집에 들락거렸다. 등화관제 훈련이 있던 날 여러 아이들이 선생님 집에서 놀다가 깜깜한 방 안에서 그만 잠이 들었는데 그 틈을 타서 아빠가 엄마 손을 덥석 잡았다. 아빠는 그때의 황홀감에서 빠져나오기 싫어서 며칠 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고 한다.
두사람은 아빠가 사관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 본격적인 공개연애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건 엄마와 아빠가 함께 찍은 당시 사진에 엄마의 동생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결혼 후 아빠는 소문난 애처가가 되었다.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는 매일 한 통씩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정숙에게’로 시작되는 그 편지에 아빠는 매일의 생활을 일기처럼 적어 보냈다. 아이들도 그 편지를 회람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 보는 언니까지 모든 식구가 아빠의 편지를 같이 읽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다는 소리를 듣고 자란 데다가 남편의 전적인 신뢰와 충성을 받고 살았던 엄마는 거칠 것 없는 인생을 살았다. 솜씨 좋고 입심 좋고 알뜰한 나의 엄마가 우리 집의 총지휘관이었다. 엄마에겐 어려운 사람이 없었다. 아들에게 해준 것 하나 없는 순하디 순한 나의 조부모는 아들 집에 얹혀사는 것으로 감지덕지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