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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r 16. 2020

글이 잘 써지는 날

부모 말고 친구처럼 대해줘

  글이 잘 써지는 날은 마음이 갑갑할 때다. 아니, 마음이 갑갑할 때 글이 쓰고 싶어진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오늘은 마음이 갑갑하다. 하남 사는 큰 딸이 닷새 있다 가는 끝머리에 기분 상하는 일이 있었다. 저를 위해 닷새 봉사한 것도 모자라 저를 데리러 온 사위에게 특별한 것을 먹여 달라는 말 때문이었다. 딸과 사위가 올 때마다 최소 한 끼는 밖에서 고기를 사 먹였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것일까? 코로나로 인해 식당에 가는 것이 꺼려진다 하여 그냥 집에 있는 것 먹자고 했더니 오빠가 나흘 동안 혼자 지냈는데 딱하다는 둥 하며 특별한 걸 먹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딸이 배달음식을 시켜먹자고 하기에 우리 동네는 대학교 인근이라 싸구려 음식 밖에 없고 맛도 없다는 걸 강조했다. 그래도 그놈의 특별한 음식 소리를 포기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아침 일찍 나가서 구이용 고기를 사왔다. 나는 고기 선물이 들어오지 않는 한 집에서는 고기를 구워먹지 않으려 한다. 기름 튀고 연기 나는 것이 싫어서이다.     


  사위는 금년에 과장으로 승진했다. 몇 주 전 딸과 사위가 오기로 했던 날 대구 코로나 사태가 발발하여 오지 말라고 했었다. 남편은 직장동료들에게 한 턱 내라고 사위에게 돈을 보내주었었다. 그것이 고맙기도 하여 사위가 밥을 사고 싶었을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몇 주 늦어진 사위 진급 축하 자리니 자기가 밥을 사고 싶은데 사정이 여의치 못하니 사위는 배달 앱으로 피자를 주문했다.

  남편이 골프 약속 때문에 12시 반에 나가야 된다고 하여 허겁지겁 시장에 다녀오고 된장찌개를 급조했다. 깊숙이 쳐 박혀 있던 고기 굽는 장비도 찾아냈다. 친정 부모님까지 모셔오니 어른 아홉에 아기가 둘이었다. 나 혼자 고기를 굽고 있는데 자기가 굽겠다고 나서는 인간이 없었다. 연기가 꽉 차서 창문을 여니 춥다고 닫으라는 소리들만 했다. 피자에 고기에 생선구이까지 먹었으니 특별한 밥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들과 부모님이 다 가고 나서 설거지와 청소를 했다. 딸년은 sns로 내가 아플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날 힘들게 하질 말든지 아플까 봐 걱정을 말든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으련만. 자기가 와 있어서 힘들었냐고 묻는데 힘들었다고 솔직히 말했다. 자기가 설거지도 도와주었는데도 힘들었느냐고 하기에 너 없이 우리 세 식구 사는 것보다는 훨씬 힘들었다고 했다. 끼니마다 새로운 거 해 먹이고 심심할까봐 바람 쐬어 주고 둘째 딸과 손녀 불러서 함께 먹이고 놀아 주었는데 힘이 안 들었다면 거짓말이다.     


  딸의 시어머니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분이다. 하나 뿐인 아들과 며느리, 손녀에게 매우 헌신적이다. 아이들이 올 때마다 맛있는 거 해 먹이고 갈 때는 반찬 만들어 바리바리 싸주신다. 집에서는 엉덩이를 붙이고 쉬는 법이 없으시다. 그런 시어머니가 너무 딱하다고 하면서도 딸은 그런 어머니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같다. 하루 세끼 다른 걸 해 먹이느라 창의력이 동이 난 나에게 집에 갈 때 싸줄 거 없냐고 묻는 소릴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고기 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미리 준비할 것도 많고 뒤처리도 복잡해서라고 하니까 저는 늘 남편이 고기를 구워줘서 힘든지 몰랐다고 했다. 딸이 착한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만 했었다. 냉정한 아빠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는 것이 고맙기만 했었다. 그런데 딸은 받는 것에만 익숙해지고 있다. 물론 고기 먹은 설거지도 사위가 했을 것이다. 딸이 하는 것이 못미더웠을 테니까 말이다.


  딸은 잘 생기고 요리 잘하는 남자가 이상형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 남자를 만났다. 사위는 신중하고 꼼꼼하며 자상하다. 딸은 제 외할아버지를 꼭 닮은 사위에게 반했었다. 사위는 내 딸을 오빠처럼, 아빠처럼 사랑해 주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그 관심의 70프로가 제 딸에게로 옮겨갔다. 사위의 부성애는 놀라울 정도다. 아내가 힘들까 봐 육아를 도와주는 여느 아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집에 있을 땐 육아는 사위 몫이다. 사위에게 육아라는 말을 쓰는 것도 어색하다. 사위의 눈과 귀는 늘 딸에게 향해 있다. 당연하게도 이제는 내 딸이 자기 딸을 잘 돌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사위의 잔소리가 늘어가고 있다.      

  딸이 시집가서 시어머니의 헌신적 태도에 감동받고 나와 비교하기 시작했을 때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만 했다. 자아실현을 부르짖는 이기적인 엄마를 만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낸 딸에게 늘 죄책감이 있었었다. 그런 죄책감을 시어머니의 존재가 더 가중시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이 다른데 왜 내가 사부인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사부인에겐 사부인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고 나는 내 방식대로 살 권리가 있지 않은가? 사부인이 훌륭한 어머니임에는 조금의 의문도 없다. 나는 훌륭한 어머니이기보다는 내 자신이 되기로 한 사람이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자. 훌륭하지는 못해도 아이들에게 내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가? 어차피 완벽한 부모는 없다. 어떤 부모라도 아이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독서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나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자 마음이 편해지고 아이들이 오는 것도 부담스럽지 않게 되었는데 딸년은 여전히 내 입장을 모른다. 호의가 계속되면 그것을 권리로 여긴다는 건 부모자식 간에도 맞는 말이다. 부모를 좋은 친구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효도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친한 친구 사이에도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그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법이다. 부모의 꿀단지도 바닥이 드러날 때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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