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에서의 첫날밤, 그리고 러브레터
요양원 사람들을 놀라게 하다
재작년에 대전으로 이사 오신 후 아빠는 119에 여덟 번 전화했다. 그때마다 응급실에서 MRI를 찍고 정밀검사를 했지만 약간의 염증이 있다는 소견 외에 나온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요양원을 알아볼 생각을 했다. 아빠가 사망진단서에 집착하시기 때문에 꼭 병원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지남력도 많이 떨어졌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하루 세 시간 근무하는 요양보호사도 엄마의 피곤함을 크게 덜어주지 못했다. 아빠의 파킨슨 증세가 심화되어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지다 보니 식사 시간에 아빠를 일으켜 앉히는 일과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도 엄마에겐 힘에 부쳤다. 엄마의 허리가 점점 나빠지고 발뼈에 금이 가서 걷는 것도 무척 불편해지고 있었다.
치료가 필요한 문제가 없고 엄마 혼자서는 아빠를 돌보기가 어려우니 24시간 간병인을 고용하거나 요양시설에 들어가시는 것 밖에는 길이 없었다. 간병인을 쓰려면 돈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람과 24시간 함께 지내는 것이 사람을 가리는 엄마에게는 무척 어려운 일이라, 남은 대안은 요양원밖에 없었다. 문제는 두 분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아빠와 엄마를 각각 설득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빠를 설득해 놓아도 엄마의 죄책감이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간신히 엄마를 설득해 놓아도 아빠의 저항이 엄마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엄마의 눈물과 분노, 아빠의 두려움과 싸운 뒤 우리는 드디어 요양원 입소를 결정했다. 두 분이 똑같이 기분파에 즉흥적이 성격이라 정말로 그곳에 갈 때까지는 간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의 의사를 몇 번이나 타진하면서 아빠를 보낼 수밖에 없다는 하소연을 수도 없이 들은 후에, 그리고 지인의 사례를 자세히 알아보고 난 후에 엄마는 드디어 아빠를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우리 동네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거리, 유명한 등산로인 계룡산 수통골 입구에 치매전문요양원이 있다. 경치 좋고 공기 좋은 이곳은 일 년 내내 울긋불긋하게 차려입은 등산객들이 오르내리는 길가, 맛집과 카페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산책하러 다니며 자주 보았던 곳이지만 우리 아빠가 이곳에 입소할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자 침상이 있다고 하여 필요한 서류를 구비해서 그다음 날 입소하겠다고 전화했더니 지금은 입소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자비로 코로나 검사를 받고 오면 몰라도 그냥은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코로나의 불길이 요양시설로 옮겨 붙어 집단 감염자가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아침에 새 지침이 내려왔으니 아무래도 곤란할 것 같지만 담당자가 오면 다시 전화를 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번에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 사실을 엄마에게 알렸다.
그런데 몇 시간 후 담당자가 전화하여 미리 접수된 케이스이니 받아준다며 다음날 아침에 오라고 했다. 다시 엄마에게 전화했더니 사실은 요양원 입소를 거절당하고 나서 아빠의 실망이 무척 컸다고 했다. 돈 만 원 쓰는 것도 벌벌 떠는 양반이 16만 원이나 드는 코로나 검사를 받겠다고 했다 한다. 엄마는 그 모습을 보고 아빠가 요양원에 가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구나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다시 입소 허락을 받아 다음날 아침 일찍 모시러 갔다.
가족관계 증명서를 떼러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중에 아빠는 생뚱맞게도 보증금을 많이 내야 하면 당신은 요양원에 안 들어가겠다고 했다. 실버타운과 혼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의 지인이 실버타운에 계시기도 하고 엄마 아빠도 실버타운에 들어가는 것을 고려했던 적이 있었다. 실버타운이 아니고 요양원이다, 요양원은 보증금도 필요 없고 나라에서 비용의 80프로를 대 준다고 했더니 나라에서 뭣 때문에 그렇게 큰돈을 대주냐며 내 말을 못 믿겠다고 했다. 가족들이 직장에 다니고 학교에 다녀야 해서 노인을 돌보지 못하는 집이 많기 때문에 나라에서 도와주는 것이라고 해도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결국 요양원에 가서 직원에게 물어보고 대답을 들은 후에야 잠잠해졌다.
직원들은 아빠의 상태에 대해 소상히 물었다. 특이점과 부탁할 점을 묻고 최근의 입원 경험과 복용약에 대해서도 물었다. 비상시 어느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가길 원하는지도 물었다. 상담이 한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그들의 전문적 태도에 믿음이 갔다. 보훈병원과 달리 이곳은 간병인을 따로 고용하지 않아도 되고 목욕과 이발, 물리치료까지 해준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퍽 안심하는 눈치였다. 지금은 감염 위험 때문에 면회와 외출이 제한되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면회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했다. 아빠를 엘리베이터 앞에서 작별하고 주차장으로 나오는 길에 요양원 연못에 새로 태어난 새끼 붕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것이 예뻐서 셔터를 눌렀다.
요양원 연못에서 헤엄치는 아기 붕어들 오후에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같은 번호에서 두 번째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요양원 담당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아빠가 혼수상태라며 119를 불러야겠다고 했다. 얼마나 오래 그런 상태인지 물어보니 한 시간 되었다고 했다. 점심식사 후 주무시기 시작해서 한 시간이 되었는데 불러도 꿈쩍 안 하신다는 것이었다. 겨우 한 시간을 가지고 놀라다니! 나는 아빠가 그렇게 죽은 듯이 주무실 때가 많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상태에서 응급실에도 여러 번 갔다 왔다고. 그때마다 잘 깨어나시고 아무 이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푹 주무시고 일어나실 거라고 말했다. 당황한 직원은 왜 그런 말을 미리 안 해주었냐고 몇 번이나 원망하듯 말했다.
욕실에 있어서 전화를 못 받았던 엄마가 늦게 직원과 통화를 하고 나서 내게 당장 가보라고 했다. 별일 아닐 것이다, 오늘 요양원 들어가신다고 아침부터 아빠가 얼마나 긴장하셨겠느냐,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전에도 손님이 왔다 가거나 컨디션이 지나치게 좋은 날 다음날은 그렇게 깊이 주무시지 않았느냐는 말로 엄마를 달랬다. 엄마는 끝까지 마음을 놓지 못했지만 내가 괜찮을 거라고 반복적으로 말하자 알겠다고 했다. 직원을 안심시키고 엄마를 안심시키는 것도 내 일이다.
나는 저녁을 먹고 요양원에 가보았다. 출퇴근하는 직원들의 일과가 끝나서인지 차량 출입차단장치가 내려져 있었다. 낮에 통화했던 직원에게 전화하여 현재 사정을 문의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받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리고 다행히도 아빠는 저녁식사 시간이 지난 후 깨어나서 대체식을 드시고 기분 좋게 계신다고 했다. 드시는 약에 대해 간호사에게 설명도 아주 잘하시더라고 했다. 황급히 뛰어 내려와서 내게 열심히 설명해주는 간호사가 고마웠다. 이렇게 또 한 번의 해프닝이 끝났다.
다음날 오후에 엄마와 함께 요양원에 갔다. 엄마는 담당 직원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직원은 아빠가 잘 주무셨고 식사도 혼자 잘하신다고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품에서 편지 한 통을 꺼내셨다. 요양원에서 전화 오길 기다려도 안 오고 면회를 할 수도 없으니 마음이 답답해서 편지를 썼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 편지를 아빠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아빠의 답장을 기다린다고 전해 달라는 부탁도 했다.
엄마와 내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아빠가 편지 읽는 모습을 직원이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엄마는 그 사진을 보고 마음이 놓인 것 같았다. 아빠는 엄마가 입혀 보낸 깔끔한 옷을 입고 널찍한 방에서 편지를 읽고 있었다. 아빠가 생활하는 방에 올라가 보지 못했기에 그 공간이 어떤 곳인지 궁금했는데 사진으로 그곳을 엿보게 되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 옛날 아빠가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 매일 한 통씩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처럼 엄마도 매일 편지를 쓰기로 했단다. 편지를 쓰는 것이 귀가 안 들리는 아빠와 통화를 하는 것보다 좋은 소통법인 것 같았다. 우리 엄마는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다. 아빠가 잘 계시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엄마는 마음이 놓이는지 벚꽃이 만개한 산책로를 같이 걷자고 했다. 엄마가 흡족해하니 오늘은 두 팔과 두 다리를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다.(그러나 엄마의 러브레터는 이번을 포함하여 총 두 통으로 끝났다. 이날 이후 매일같이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 엄마의 낭만을 앗아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