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 모이는 독서모임, 한 주에 한 권 읽는 수북수북 북클럽을 발족한 사람은 나와 나의 젊은 친구 염이다. 30년째 치유 독서모임을 꾸려온 나는 다른 성격의 북클럽을 해보고 싶었고 그녀는 독서모임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독서취향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서로 읽은 책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 한 명의 남성도 합류하기를 원해서 멤버가 세 명이 되었다.(참고로 우리 셋은 대전시 덕명동에 소재한 H교회의 상담실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선정도서 없이 자유롭게 책을 소개하는 모임도 유익했지만 30년째 같은 책 함께 읽기 운동(?)을 해온 나는 이렇게 초점 없는 헐렁한 모임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 교회의 지역사회참여사업의 일환으로 공간과 예산을 받을 기회가 생겼다. 주중에 비어 있는 교육관을 사용하여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을 해보라는 취지였다.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고민하다가 나의 적성과 역량에 맞는 활동은 역시 독서모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독서모임에 예산은 그다지 필요치 않았지만 공간은 꼭 필요했다. 그렇게 기획된 독서모임의 오리엔테이션이 3월 4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2월부터 코로나의 불길이 대구를, 서울을, 대전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우리 북클럽의 출발은 점점 요원한 일이 되어갔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면 밀어붙이는 나의 성격상 오리엔테이션부터 하고 보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오리엔테이션은 문자 대화방에서 할 수 있었다. 북클럽 신청자들에게 할 말을 미리 글로 써놓았다가 오티하는 시간에 조금씩 잘라서 공유했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가 한 두 주 내로 잡힐 것 같은 분위기였기에 다음 모임도 그런 식으로 하다보면 곧 오프라인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나이브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염이 화상채팅을 제안했다. 새로운 것을 무조건 환영하는 나는 격하게 찬성하고 바로 앱을 깔았다. 그녀와의 채팅에 성공하자 회원들에게 화상채팅을 하자고 권유했다. 나를 빼고 전체 6명 중 절반은 환영하고 절반은 주저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가 찬성했고 우리는 화상채팅으로 한 달 동안 4번의 모임을 진행했다.
이 가상공간은 임시방편이었지만 점점 적응이 되니까 회원들이 오프라인모임을 거부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이다. 농담이다. 화상채팅은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소리도 자주 끊어지고 바디랭귀지를 읽기 어렵기 때문에 일일이 다음 발언자를 호명해야 한다. 하여간 우리의 실험정신이 좋게 소문나서 두 명의 편입생이 더 들어왔다. 9명이 함께 소통하기에 이 가상공간이 좁기는 하지만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재미가 있다.
네 번째 모임은 류시화가 엮은 잠언시집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을 가지고 모였다. 각자 한 편의 시를 고르고 그것을 외워서 모임 시간에 암송하도록 했다. ‘좋은 시는 읽고 또 읽어도 좋고, 평생동안 되새기고 또 되새겨봐도 좋기(모티머 애들러)’ 때문에 회원들의 뇌리에 좋은 시 한 편을 새겨주고 싶었다.
각자 외울 수 있는 분량이면서 마음에 드는 시를 고르느라 부심하고 외우느라 끙끙댔다고 했다. 다른 일을 하면서는 도저히 외워지지 않더라고 했다. 시도 애인처럼 오롯이 자기만 바라봐주기를 원하나보다.
나는 ‘그런 길은 없다’를 골랐는데 그 이유는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나 이전에 누군가가 걸어간 적이 있고 비슷한 여행을 하는 미래의 누군가가 걸어갈 길’이라는 통찰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통찰은 현재의 나를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과 연결해주기 때문에 고통과 더불어 오는 외로움을 덜어준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는 연민과 고마움을, 미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갖게 한다.
청중이 있으니 첫 소절부터 버벅거렸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첫 주자의 실수는 다른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주게 마련이라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회원들의 발표가 이어졌다. 그들이 고른 시만 보아도 그들의 내면을 알 수 있었다.
과거에 말기 환자를 돕는 일을 했던 경험이 있었던 염은 에이즈 환자가 쓴 시에서 말기 환자들의 고백을 들었다고 했다. 시인은 ‘함께 잠을 잘 사람, 발을 따뜻하게 해 줄 사람, 내가 읽어주는 시와 짧은 글들을 들어줄 사람’을 원한다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들으니 이 시가 코로나에 걸려 격리치료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코로나는 치명률이 높지 않다고는 하지만 일단 감염된 사람은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늘어나는 확진자 수에만 집중했지 환자 개인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못했었는데 사촌언니의 미국 사는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를 보고 그 아픔의 정도가 실감이 났었다. 카뮈의 페스트에서 읽었던 구절,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고통은 어떤 인간도 정말로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진리이다. 비록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지인의 지인의 지인이 경험한 얘기를 전해 들으니 코로나에 걸린 느낌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었다.
늙으신 부모님을 병원에 모셔놓고 자주 방문하면서도 늘 마음 아파하는 한 회원은 ‘75세 노인이 쓴 산상수훈’을 골랐다. ‘내 굼뜬 발걸음과 떨리는 손을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 위해 오늘 내 귀가 얼마나 긴장해야 하는가를 이해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물컵을 엎질렀을 때 그것을 별 일 아닌 걸로 여겨준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고백은 내 부모님의 고백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이해하고 그분들에게 위안이 되고 싶으면서도 자꾸만 화를 내게 된다는 그의 고백은 나의 고백이기도 했다.
50대 후반의 한 회원은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그저 행복하라는 한 가지 의무뿐’인데 자신은 평생 성취를 쫓느라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시를 외우는 시간 동안은 잡념이 생기지 않고 마음이 평안했다고 했다.
자칭 문학소녀였다는 40대 회원은 오래 전 이 시집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가 시집을 펼치지 못하게 막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마터면 내다버릴 뻔 했는데 이번에 읽게 되어 참 다행이라고 했다. 이런 잠언을 내다버리다니! ‘잠언이 없는 문화보다 더 절망적인 사태는 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잠언을 거들떠보지 않는 사태이다’라고 한 해설자의 말이 그녀에게 들어맞을 뻔 했다.
지난 주 편입한 남성회원은 천상병 시인의 ‘나무’를 골랐다. 그는 은퇴 후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나무를 주로 그린다고 한다. 이 시집에서 공감되는 시가 별로 없었는데 제목 때문에 끌렸다고 했다. 시를 외우기 위해 반복적으로 읽다보니 ‘사람들이 죽은 나무라고 하는’ 그 나무가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꿈을 꾸었다는 대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다. 시를 곱씹으며 작업을 하던 중 나뭇가지에 이파리를 그려 넣다가 문득 ‘이건 죽은 나무인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 회원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 시가 늙어가는 우리들을 가리키는 은유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보고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겠지만 우리는 아직 죽지 않았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다.
우리 북클럽의 다크호스인 여성회원은 역시나 도발적인 시를 골랐다. 이 시에는 ‘어떤 진리에도 머물지 말라. 그것을 다만 한여름밤을 지낼 천막으로 여기고 그곳에 집을 짓지 말라. 왜냐하면 그 집이 당신의 무덤이 될 테니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런 말은 현실의 발판이 매우 견고하거나 현실에 염증이 난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녀가 이 시를 고른 이유는 사람들이 소위 진리라는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사이비종교가 생기는 것 같다고 느껴서라고 했다.
내가 새로운 북클럽을 시작하고자 한 이유 중 하나도 그런 거였다. 신천지 사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거기 무엇이 있길래 사람들이 몰려가는지를. 개인적인 동기야 다 다를 수 있겠으나 한 마디로 말해 확고한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램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문제는 그 진리를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기를 바란다는 데 있다. 자기 머리를 쓰지 않는 데 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더 그런 경향이 심하다. 이성을 사용하는 것을 신에 대한 모독으로 느끼기도 한다. 종교지도자와 교회에 대한 순종을 신에 대한 순종이라고 착각한다. 나는 사람들을 깨우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사고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그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읽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함께 읽기를 선택한 것이다. 강의와 달리 책읽기 모임은 참여자들이 능동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따라올 수가 없다.
두껑을 열고 보니 북클럽 신청자 중 절반은 이미 왕성한 독서가들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혼자서는 책을 잘 안 읽게 되어 강제성 있는 모임이 필요했다고 했다. 모임이 진행될수록 아주 적절한 조합을 이루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이 아파서 한 번 결석한 사람을 빼고는 지금까지 책을 안 읽어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적극적인 사람들이 열심히 발언해주니까 나머지 사람들은 들으면서 많이 배우고 있을 것이고 책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커지고 있을 것이다.
오늘의 소감 중 가장 흡족했던 것은 시를 말장난이라고 생각해 잘 읽지 않았었는데 암송하기 위해 읽고 또 읽는 과정에서 좋은 시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까지 파악한 바에 의하면 우리 회원들의 독서취향은 대체로 비문학쪽이다. 직접적인 묘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지는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좋은 시와 함께한 이번 주는 내게도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