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60년생 여자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고 대학교육까지 받았으며, 나의 부모는 그 시대로서는 지식인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으니 인구통계학적 특성 측면에서 나를 60년생의 평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60년생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나의 동갑내기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대감을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내 부모의 자식들은 딸 아들 구별 없이 공평한 대접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딸들까지 대학에 보내는 것은 어지간히 계몽된 부모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게다가 나는 피아노를, 동생은 바이올린을 배웠으니 우리 가족은 문화 수준도 높은 편이었다. 그것은 나의 고향이 군사지역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곳이고, 우리 부모가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
당시 장교 부인들 중에는 서울에서 온 신여성들이 많았다. 음악이나 미술을 전공한 그 부인들이 교습소를 차린 덕분에 내 고향 아이들은 악기와 붓을 다른 지역 아이들보다는 쉽게 접했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교회 반주를 하며 피아노 실력을 키워나갔다.
대학에 다닐 때까지 내가 여자라서 서러운 적은 없었으나 직장생활을 할 때부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 성역할 고정관념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번역 사원으로 입사했는데도 과장은 재떨이 비우기와 회의 때 커피 준비가 내 담당이라고 말했다. 그때 기분이 묘했지만 감히 거부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사무실의 꽃이라고 말했을 때도 왠지 꺼림칙했지만 좋은 뜻인가 보다 생각했다.
결혼 후부터 여자와 남자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를 본격적으로 학습하게 되었다. 밥 한 번 해보지 않고 결혼한 것이 흉이 되는 것은 내가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에게는 흉이 아닌 것이 내게는 모조리 흉이 되었다. 엄마는 해보면 다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미리부터 집안일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다. 내 남편은 여자들이란 태어날 때부터 집안일을 할 줄 아는 존재라고 믿었기에 내가 반찬 하나 변변히 만들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때까지 해 주는 밥 먹고 공부만 했는데 밥을 잘하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닌가?
결국 나는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한 후부터 어쩔 수 없이 여자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남의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공부가 제일 쉬웠다는 말이 그냥 나오는 게 아니다. 그때부터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시기가 시작되었다. 살림의 기초부터 배워야 했으므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다음날 아침 먹을 국을 저녁에 끓여놓지 않으면 남편이 아침을 걸러야 했다. 당시로서는 남편의 밥을 굶기는 것은 거의 죄악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나의 이십오 년 인생은 밥 잘하는 예쁜 아내가 되는 준비 기간이 아니었건만 젊은 새댁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오로지 요리와 살림에만 있었다. 남편은 직업상 남의 잘못을 찾아내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칭찬과 인정이라는 단어는 그의 사전에 없었다. 아무리 칭찬을 하려 해도 자기 어머니의 솜씨와 비교가 안 되는 내게서 칭찬거리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노력하면 보상이 따라왔던 학창 시절이나 직장생활과는 딴판인 가정생활은 나를 좌절의 늪에 빠뜨렸고 그 늪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나는 살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내가 잘하는 일을 찾다 보니 어찌어찌하다 음악대학에 편입하게 되었다. 다시 공부의 세계로 들어가니 숨통이 트였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피아노 연습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동안 아이들은 가사도우미의 손에 맡겨졌다.
졸업 후 피아노 레슨을 하면서 대학원 진학도 생각해보았으나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아이가 소아 우울증 증세를 보여서 포기했다. 그때부터 심리상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결국 상담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아이들 때문에 대학원에 들어갔지만 공부 때문에 다시 아이들에게 소홀해졌다. 아이들의 학교 성적이 말이 아니었다. 소 잃은 뒤 외양간 고치는 격으로 다시 아이들 뒷바라지에 전념하던 중 막내가 태어났다. 그래도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강의와 상담을 했다. 그리고 혈액암에 걸렸다. 십 년 전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어이 살아남았다.
쓰고 보니 나의 육십 년 인생이 파란만장하다. 나는 여자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평가받고 싶어서 그토록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다. 처음부터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았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지금은 내 평생 가장 편안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친정 부모님이 우리 동네로 이사 와서 하루 걸러 소동을 일으키고 있지만 글쓰기를 시작한 덕분에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고 있다. 육십 년생 여자는 이렇게 생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