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부터의 도피, 자아로부터의 도피
수북수북 시즌 2 네번 째 모임 후기
이번 주의 지정도서인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서구 사회가 직면한 경악과 실망감을 사회심리학의 관점에서 분석한 책이다.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 이성의 진보와 자유의 확장으로 인류가 미래를 낙관하고 있었을 때 나타난 나치의 종족 우월주의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성은 인간 진보에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깨뜨렸다. 빛나는 지성의 전통을 가진 독일국민이 어떻게 그런 야만적인 지도자에게 호응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근대인은 절대군주와 교회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반대급부로 찾아온 고립감과 무력감으로 인해 새로운 권위가 필요하였고 히틀러는 그러한 인간 심리를 이용하여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으로부터의 자유’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해야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적극적 자유는 자발적 행위를 통해서만 실현된다고 보았다. ‘~으로부터의 자유’를 다른 말로 하면 ‘~하지 않을 자유’ 즉, 군주와 교회, 국가나 부모 같은 외적 권위에 순종하지 않을 자유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은 외적 권위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지만 양심, 초자아, 상식, 여론 등 내적 권위가 우리에게 부리는 횡포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한 일이라고 믿는 일들이 사실은 사회가 우리에게 부여한 올가미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등골 서늘해지는 일이다. 이렇게 자동인형처럼 사회에 순응한 결과는 여전한 고립과 불안이다. 자신의 무의식적 동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대신 진정한 자아가 원하는 행위를 선택할 때 우리는 타인, 그리고 세계와 다시 연결될 수 있다.
이 책은 철학과 심리학, 사회학을 아우르는, 읽기 쉽지 않은 책이었다. 저자의 철학을 회원들이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였는데 책을 읽다가 난해한 심리학 용어나 잘 모르는 역사적, 종교적 사실의 지루한 나열에 질려버릴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책의 일부만이라도 정독하게 하려고 전체 내용을 나누어 개인별로 요약 과제를 주었다. 그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 회원들이 과제를 하지 않을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자기가 맡은 부분을 요약해서 제출했다. 나는 회원들이 포기하지 않고 과제를 했다는 사실 자체에 감격했다. 큰 산을 하나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약 과제를 하는 대신 독후감을 생략하고 발제문을 하나씩 만들어보라는 제안을 했었는데, 이 제안을 받아들인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우리 회원들 대다수가 전업주부들인지라 책 읽고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을 것이다. 내용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지 못하다 보니 요약 발표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지루한 감이 있었다. 한 회원이 만든 발제문을 기초로 토론하는 시간이 있어서 그나마 오늘 모임이 생동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저자는 권위주의를 설명하는 파트에서 합리적 권위와 억제적 권위를 구분한다. 합리적 권위란 학생을 대하는 교사처럼 권위를 행사하는 목적이 상대편을 성장하게 하는 것임에 반해, 억제적 권위란 노예주인이 노예를 대하는 것처럼 상대를 착취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저자는 억제적 권위의 결과가 반감과 증오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와 반대로 권위를 터무니없이 과대평가하고 찬미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상반되는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 발제자의 질문이었다. 개인의 성격이나 인식 차이에서 기인한 결과일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한 사람은 다른 생각을 제시했다. 나치 독일의 경우처럼 사회 지도층이 억제적 권위에 순응하고 독재자를 찬미하는 분위기에서는 반대의견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본다는 것이었다. 타당한 생각이었다. 저자 자신은 원래는 반감을 품고 있던 사람들도 그러한 감정을 계속 갖고 있는 것이 불편하고 약자이기 때문에 억지로 순응하는 데서 오는 굴욕감을 느끼기 싫어서 맹목적 존경심으로 대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다른 토론 주제는 진실한 의지와 거짓된 의지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아이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은데도 어른을 기쁘게 하기 위해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경향성에 관한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아이는 이러한 사회적 거짓말을 자신도 믿어버리게 되는데 이는 학교에 억지로 가야 하는 데서 오는 혐오감을 억압한 결과라고 말한다. 저자는 ‘어떤 때는 억지로 학교에 가지만 어떤 때는 정말 가고 싶어서 간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식할 수 있다면 그 아이는 훨씬 행복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어째서 그렇다고 볼 수 있는지가 토론 주제였다.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 한 회원은 몸이 아픈 것을 억압하는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자신은 고칠 수 없는 증상을 갖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는 것이 힘들어서 병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픈 것을 잊고 산다고 했다. 그래서 바쁘게 사는 평상시에는 다소 마음이 편하지만, 병원에서 의사가 증상의 정도를 묻을 때 대답을 잘 못 하는 것은 난점이라고 했다. 그녀의 경험은 아동이 학교에 대한 혐오감을 억압하는 것과 유사점이 있었다. 마치 아프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병과 더불어 사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그 병을 고치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가 학교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버리면 학교에 대한 애착이라는 것도 이론만으로 존재하는 껍데기 감정이 된다. 그것이 불행이라는 것이다. 건강한 삶을 기대하지 못하는 불행과 학교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기대하지 못하는 불행은 닮아있었다.
돌이켜보니 두 가지 토론 주제가 모두 감정의 억압에 관련된 것이었다. 감정의 억압은 우리의 자발성을 박탈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