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면 뭘 먹을래?”라는 질문에 망설임 없이 나는 “커피 백 잔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다. “커피가 최고심. 커피 백 잔~ 할래용”이라는 문구가 적힌 키링을 늘 가방에 달고 다니는데 키링을 부적처럼 챙겨다니는 이유는 나의 마음을 적확하게 대변하고 있어서다. 그냥 커피가 아닌 잘 로스팅된 에티오피아 커피 한 잔이라면 하루를 거뜬하게 보내는 건 무리가 없다. 맛있는 커피는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다. 특히 에티오피아 커피는 산미가 강한데 입안에 짜릿함을 선사할 때 눈이 번쩍 떠진다. 커피가 주는 기쁨을 누리러 종종 커피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커피가 내 삶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다. 재수생 때 처음 아메리카노를 접했는데 아주 강렬한 맛에 깜짝 놀랐다. 한약같이 쓴맛이라 왜 마시는지 이해를 못 했는데 모의고사 성적이 낮게 나오거나, 문제가 도통 풀리지 않을 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으로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빨대로 쏙 빨면 쓴맛의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 온몸을 타고 흐르면서 ‘잊어. 이제 시작이야.’라며 날 위로하는 것 같았다. 한 모금도 마시기 힘들었던 아메리카노를 견뎌보겠다는 마음으로 반 잔, 한 잔을 넘어 세잔까지 마시는 양을 점점 늘려갔다.
요즘도 버텨보겠다는 마음으로 커피를 마실 때가 있다. 특히 모닝커피는 생존형 커피다. 마시고 그렇지 않고의 차이가 크다. 커피가 옆에 있으면 전투력이 상승하는 느낌이 든다. 1시간 정도 소요되는 행정업무를 30분 안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이 생긴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업무 효율을 위한 명분으로 출근길 10분의 여유가 주어지면 프랜차이즈 커피로 향한다. 산미 강한 커피를 판매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의 노동 동료이자 노동 동력이 필요하기에 몸이 이끄는 데로 커피를 산다. 커피를 살 여유가 없다면? 출근하자마자 커피부터 내린다.
생존형으로 커피를 마시다가 커피도 맛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름날 부산 동래 모모스 커피에서 에티오피아 커피를 마시고 충격을 받았다. 커피를 설명하는 안내문 아래 적혀있는 맛과 내가 느끼는 맛이 굉장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커피에서 어떻게 꽃 향과 과일 향이 날 수 있겠냐며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켰는데 그 맛들이 차례로 느껴졌다. 한 모금이 남았을 때 어찌나 아쉽던지. 평소 이천 원 주고 마시던 커피를 처음으로 오천 원 이상 주고 마셨는데 비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천 원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데 어찌 아까울 수 있겠는가. 그날 이후로 커피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매일 마시는 커피를 이제는 즐기면서 마시자는 마음가짐을 가졌고 에티오피아 원두와 함께 하기로 평생 계약을 맺어버렸다.
커피의 맛을 즐기게 되면서 여행을 가거나 다른 도시를 방문하게 된다면 무조건 카페를 중심으로 일정을 짠다. 맛있는 커피 한 잔만 있어도 난 즐거우니까, 그리고 이 즐거움을 함께 하루를 보내는 사람에게도 선물하고 싶어서 일정이 잡히면 나는 카페부터 찾는다. 화려하고 큰 대형 카페보다는 작아도 확실한 맛을 선물하는 카페를 위주로 간다. #로스터리카페, #에티오피아원두, #시그니처커피 이 3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찾고 여행지 또는 날씨와 어울리는 원두를 검색하기도 한다. 특히 더워지기 시작하는 7월에는 #콜롬비아엘파라이소리치피치를 무조건 찾는다.
한여름은 땀을 많이 흘려서 그런지 당 충전이 절실한데 그렇다고 설탕이나 시럽이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싶지 않다. 다 마시고 나면 입안에 남아 있는 텁텁함이 더 갈증을 유발하는 느낌이 들어서다. 복숭아 향을 가득 느낄 수 있는 콜롬비아 엘파라이소 리치피치 원두를 내린 아이스 드립 커피를 마시면 더위를 잊고 황홀경에 빠져버린다. 한입 하는 순간 꿉꿉함은 어디 갔는지 몸이 보송해지는 느낌이고 더워서 일그러졌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다. 마시기 전부터 달콤한 복숭아 향을 느끼고 한 모금에 입안에 화사함을 선물하는 엘파라이소 리치피치.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원두를 이렇게나 찬양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희소성이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무산소 발효라는 특별한 가공방식으로 생산된 원두여서 어디든 쉽게 만날 수 있는 원두는 아니다. 그런데 이 원두를 파는 카페가 있다고? 그러면 안 갈 수가 없다.
지금도 커피를 알아가는 중이다. 요즘 내 마음을 사로잡는 커피는 럼 배럴 에이징 원두다. 술통에 원두를 숙성시키는 방식으로 가공한 원두인데 와인의 맛을 느낄 수 있어 늦은 저녁 카페인 수혈이 필요할 때 종종 찾는다. 어두운 밤과 시원하게 내려진 럼 베럴 에이징 원두의 궁합은 최고다. 와인 바를 가지 않아도 그 이상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커피의 세계는 넓고 다양하다. 커피의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지금 나에게 어떤 원두가 필요한지 명확하게 말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원두를 선물할 수 있는 커피 애호가가 되고 싶다.
현재 당신의 기분은 어떤가요? 어떤 커피가 필요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