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로냐 미식 기행문 1
(볼로냐 풍경을 담은 사진 엽서. 출처: 위키피디아. Photo by Petar Milošević)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볼로냐를 선택한 이유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코로나 팬데믹이 발발했던 2020년, 초반의 공포감이 다소 진정되고 제한적이지만 다소 일상이 회복되었던 3월의 어느날, 나는 사무실의 작은 회의실에서 권은중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표님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뒤의 첫 만남이었지만 나는 권 작가에게 관심이 많았다. <한겨레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신문사를 그만두고 홀연히 이탈리아로 떠나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다닌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 권 작가는 현지 레스토랑에서 인턴 실습을 마치고 몇 달 간 더 이탈리아에서 머물다가 돌아온 직후였다. 이탈리아 음식과 이탈리아 와인을 애정하는 나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첫 만남임에도 우리는 폭풍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음식과 와인, 문화와 역사, 사람들, 우리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요리 여행다큐 <누들로드> 시리즈를 비롯해서 음식과 여행이 어우러진 다큐멘터리를 섭렵했고, 볼로냐 도서전에 다니면서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매력에 푹 빠졌던 내가 이런 필자를 놓칠 리가 있나. 흐뭇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치면서 ‘무조건 책을 쓰게 해야지.’ 하는 결심을 마음속으로 굳히던 참이었는데, 권 작가는 내게 한 가지 고민거리를 털어놓았다.
“시칠리아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사실 시칠리아를 절반밖에 못 돌았어요. 그런데 코로나가 이렇게 심하니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네요.”
“그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는 없죠. 이제 쓰셔야 해요. 다시 가지 않고도 바로 쓸 수 있는 지역이 없을까요? 오랫동안 머물러 계셨던 곳이 어디에요?”
“학교 다니느라 피에몬테에 제일 오래 있었지만 공부하고 일 하느라 별로 둘러보질 못했어요. 편안하게 즐긴 곳은 시칠리아와 볼로나였죠.”
“볼로냐에는 어떤 매력이 있었나요?”
나의 질문에 볼로냐에 대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이탈리아 음식의 중심지인 미식의 도시, 소상공인들과 장인들을 보호하고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게 지원하는 협동조합의 도시, 세계최초의 대학이 탄생했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했던 도시, 중세의 암흑시대에 수많은 여성 인재를 길러낸 미녀의 도시 등등. 권 작가의 이야기보따리는 끝이 없었다.
볼로냐 도심에서 바라본 아시넬리 타워와 가리센다 타워. Photo by Didier Descouens
“됐네요. 그럼 볼로냐 얘기를 쓰세요.”
내 답변이 너무 선선한 것이 미심쩍었는지 권은중 작가가 염려를 나타냈다.
“한국 사람들이 볼로냐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요?”
“볼로냐 도서전에서 각종 상을 수상하면서 볼로냐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어요. 요리 다큐 보니까 볼로냐가 맛의 중심지던데요. 그렇다면 출판계나 음식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도시가 아닐까요? 그리고 볼로냐가 낯선 독자들에게는 말씀하신 매력을 잘 어필해주시면 승산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우리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볼로냐로 갔다.
볼로냐 음식을 맛보면 누구나 행복해진다
사실 한국 사람들이 볼로냐 이야기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권은중 작가의 염려는 타당한 것이었다. 흔히 이탈리아 하면 절대 다수가 로마를 떠올린다. 그 다음은 패션의 도시 밀라노와 피렌체, 베네치아 등 관광으로 유명한 도시들일 것이다. 반면에 롬바르디아 주(주도 밀라노), 베네토 주(주도 베네치아), 토스카나 주(주도 피렌체)에 둘러싸인 에밀리아로마냐 주(주도 볼로냐)는 볼로냐 도서전 외에는 한국인들의 관광경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점에서 북부 피에몬테 주의 요리학교를 거쳐 시칠리아와 볼로냐로 이어진 권 작가의 이탈리아 행보는 기이했다.
그러나 그의 기이한 행보에는 이유가 있었다. 피에몬테 주의 요리 학교 선생님들이 이탈리아 맛의 원조로 추천한 곳이 시칠리아와 볼로냐였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는 그 진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자존심 강한 피에몬테(프랑스와 접경한 피에몬테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을 잘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좀 더 선진국에 산다는 자부심이 있다.) 사람들이 인정할 만큼 볼로냐는 이탈리아 맛의 중심지인 미식의 도시이다. 권은중 작가는 볼로냐에 머무는 동안 그 도시의 매력에 푹 빠졌다고 했다. 단순히 내가 권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기에 내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인 것이다.
나는 우선 집필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왜 볼로냐의 맛과 역사, 문화를 탐구하는지’ 프롤로그를 먼저 써달라고 했다. 그래야 흔들림 없이 써나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권 작가는 생각보다 프롤로그를 빨리 썼고, 세부 목차를 작성해서 보내왔다. 나는 동의했고 콘텐츠에 대한 기획자와 저자의 합의가 끝났다. 이제 본격적인 집필의 시간이다.
우선 나는 1장 맛에 대한 샘플원고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전체 원고의 톤앤매너를 결정할 샘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곧이어 들어온 ‘돼지의 맛’에 관한 샘플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볼로냐중앙역에서 내려 시내의 마조레 광장까지 들어오는 동안 거리 전체에 가득한 돼지국밥 냄새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나는 부추와 소면을 넣은 부산의 뽀얀 돼지국밥을 좋아한다. 돼지국밥은 소고기로 끓인 설렁탕과는 다른 구수한 풍미가 느껴진다. 이탈리아에서 많은 도시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시내에서 돼지국밥의 구수한 향기가 나는 곳은 없었다.”
결국 돼지국밥 냄새는 골목 안에 자리한 푸드코트 안의 수많은 가게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어지는 이탈리아 인들의 살루미에 대한 자부심과 레스토랑에서 파는 탈리에레(햄과 치즈, 빵을 한판에 내놓는 모듬요리) 이야기에도 군침이 돌았다.
비스트로의 진열장. 각종 살루미와 치즈, 파스타가 먹음직스럽다.(사진: 권은중)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좀 더 구체적인 감각 묘사를 넣어서 생생한 현장감을 살려달라고 피드백을 했다. 피드백을 받아 수정을 해서 보내온 원고를 보니 훨씬 더 느낌이 좋았다.
“수정원고 좋습니다. 세세하게 손보는 건 1장 전체 원고가 들어온 다음에 할 테니 일단은 주욱 가시죠!”
나는 톡으로 Go 사인을 보내면서 이런 톤으로 1장 맛에 관한 원고를 완성해달라고 요청했다.
1장 맛은 파스타의 맛, 돼지의 맛, 토마토의 맛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돼지의 맛을 먼저 쓰기 시작했지만, 초고가 완성된 뒤에 순서를 바꾸었다. 아직 한국 독자들은 프로슈토나 살루미 같은 이탈리아식 생햄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파스타라면 너무나 익숙하고 사랑받는 음식이 아닌가. (탄수화물을 멀리하는 이도 무작정 배격할 수만은 없는 게 파스타라고 나는 믿는다.) 따라서 볼로냐라는 도시의 생소함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대중들에게 익숙한 파스타 이야기가 먼저 등장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었고, 권 작가도 이에 동의했다.
1장 집필 속도로 봐서는 빨리 완성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원고 완성은 시간이 많이 걸렸다. 2장 치즈, 커피도 별 무리없이 진행되었지만 문제는 3장이었다. 붉은색 회랑의 도시, 현자의 도시, 미녀의 도시 이야기는 1,2장과 달리 음식을 벗어나 본격 역사와 인문학을 주제로 담고 있었다. 서칭하다 보니 자료가 너무 많아서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담아내야 할지 고민하던 권 작가는 의논할 게 있다며 3장의 일부 원고는 메일로 보낸 뒤 사무실로 나를 찾아왔다.
“편집장님, 쓸 얘기가 너무 많은데 다 담다 보니 지루하고 분량도 너무 길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 부분을 잘라내야 할지 도저히 판단히 안 서네요.”
“저자가 직접 잘라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전부 쓰려 하지 마시고 원래 주제에 맞는 이야기들 중심으로 일단 풀어가시고, 도저히 못 자르겠다 하면 그냥 주세요. 편집자들은 가위질 잘해요. 제가 팍팍 줄여 드릴게요. 그런 다음에 작가님이 보시고 더 뺄 거나 다시 붙일 것들 정리하시면 되지요.”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작업을 통해 나는 3장 원고를 원래 분량의 30%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첫 미팅부터 원고가 완성되기까지 약 9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