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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리나 Aug 02. 2018

실체적 진실은 사실과 허구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서평1] 330년 동안 이어진 전대미문의 토지소송의 실체 

“나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려 애쓸 뿐입니다.” 어느 법정 드라마에서 변호사가 무죄를 주장하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한 말이다. 때때로 어떤 진실은 사실보다 허구에 가깝게 느껴지기에, 우리는 ‘거짓말 같은 진실’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330년에 걸친 전대미문의 토지소송 사건을 우연히 알게 된 정명섭 작가는 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결합시켜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이라는 팩션으로 구상했다. 

한때 한양에서 가장 잘나가는 외지부(변호사)였다가 몰락해 선술집에서 일하고 있는 주찬학에게 전라도의 외딴 섬 하의도 주민 윤민수와 두 사내가 찾아오는 데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백 년 전 정명공주와 혼인한 풍천 홍씨 집안의 토지수탈과 억압이 극에 달해 제소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것이다. 주찬학은 왕실을 제소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일언지하에 거절지만 그의 마음 한편에는 이번 소송을 기회로 재기에 성공해 왕년의 명성을 되찾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소지(소장)를 접수조차 해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며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위기에 처한 하의도 주민들을 본 주찬학은 결국 마음을 바꿔 소송 대리인이 되기로 한다. 


노련한 외지부 주찬학이 교묘한 술수로 소장을 접수시키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 홍유찬을 재판에 끌어들이는 장면, 반대로 홍씨 집안의 서자 홍신찬이 새 변호사로 나서 주찬학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가는 장면 등은 스피디한 법정드라마를 보는 듯한 박진감과 스릴을 선사한다. 유난히 토지와 재산 관련 송사가 많았다는 조선시대의 재판과정과 변호사의 존재는 신선함과 놀라움을 선사하고, 당시의 삶을 세밀화처럼 그려내는 저자의 묘사는 매력적이다.


팽팽하게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재판이 반복되지만 재판관들은 홍씨 집안의 손을 들어주고, 패소의 와중에 윤민수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게 된다. 다행히 주찬학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 임금과 극적인 만남을 가졌지만, 결국 토지를 돌려받지 못하고 주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하지 말라는 임금의 전언만을 받은 채 아쉬운 마음으로 낙향한다. 


330년에 걸친 이 소송사건의 불씨는 인조가 선조의 딸 정명공주를 시집보내면서 하의삼도의 땅을 마음대로 공주의 시댁인 홍씨 집안에 넘긴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주민들은 홍씨 가문에 번번이 패하면서도 땅을 되찾기 위해 대를 이어가며 싸웠다. 그러다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 1956년에야 비로소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무려 330년 만의 일이었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농민항쟁의 승리였다.


늘 흥미롭게 읽는 역사 추리 장르의 소설이었고 흥미로운 법정 장면과 극적인 위기 타결 등의 사건 전개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계속 무거워졌던 이유는, 아마도 주인공이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우리라는 느낌을 책 초반부터 강하게 받은 탓이었을 게다. 국가와 권력자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하고 보상받을 길이 없는 민중의 모습은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 현재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역사란 단순히 지난 과거가 아닌 현실로 이어지는 우리 삶의 궤적이자 끊어지지 않는 현재 진행형이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330년간 지속된 소송은 실체적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상상 속 이야기처럼 현실과 동떨어져 보인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의삼도의 토지 소송이라는 현실에 조선시대 법률 대리인 외지부 이야기를 결합시켰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전자를 허구로 보았다. 수백 년간의 소송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실제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은 것이다.” 실체적 진실이란 어쩌면 사실과 허구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정명섭 지음, 은행나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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