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구석
I
뉴펀랜드 응급실.
돌산을 오르다 넘어졌다. 손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접수하며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응급실, 엑스레이, 마취, 깁스. 얼마나 나올까.
집에서 2,000km 떨어진 섬이다. 온타리오 헬스카드가 여기서도 될까.
접수 직원이 물었다.
"헬스카드 있으세요?"
"온타리오 건데요..."
"괜찮아요."
그게 끝이었다. 주가 달라도 지갑을 꺼낼 일이 없었다.
II
아침에 일어나니 눈길이 깨끗하다. 도로로 나온다. 느린 제설차가 눈을 삼키고 소금을 뱉는다.
점심시간. 식당으로 향한다. 토론토 대학병원 단지를 가로지른다.
어두침침한 하늘 아래 샛노랑 SickKids 건물이 환하게 빛난다. 희귀병 아이들이 모이는 종합병원이다. 증축한 연결다리가 빌딩 사이를 잇는다. 저 안에서도 누군가는 치료 중이다. 돈 걱정 없이.
집에 돌아와 밴쿠버에 사시는 부모님과 통화한다.
두 분은 정부 연금으로 생활하신다. 소득세를 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러 혜택을 받으신다. 충분하진 않지만 최소한은 보장된다.
아빠가 치과에 다녀오셨다더니 목소리가 살짝 새나온다. 저번에 정부 치과 플랜을 신청해 드렸는데 어제 처음 사용하셨단다.
엄마는 얼마 전 레이저 눈 수술을 하셨다.
치과와 안과 비용이 하나도 안 들었다고 좋아하신다.
요즘은 함께 커뮤니티 센터에 다니신다. 수영, 헬스, 요가 수업, 사우나. 모두 무료다.
그러고 보니 참 많은 것들을 무료로 누린다.
병원, 제설차, 연금, 커뮤니티 센터.
그러나 공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III
이게 다 어디서 나오는 걸까.
격주 금요일. 월급이 들어온다. 급여명세서를 클릭한다. 총액을 본다. 괜찮은 숫자다. 스크롤을 내린다.
연방세 (Federal Tax)
주세 (Provincial Tax)
국민연금 (Canada Pension Plan)
고용보험 (Employment Insurance)
한 줄씩 돌아가며 돈을 가져간다. 마지막 줄. 실수령액. 삼분의 일이 사라진다.
속이 쓰리다. 통장에 찍히는 돈은 생각보다 적다.
하지만 어디 쓰이는지는 안다. 부모는 자식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데, 나는 엄마 아빠한테 혜택이 돌아가는 걸 보면 배가 덜 아프다.
내 세금으로 제설차가 움직인다. 누군가의 세금으로 연금이 나오고 육아휴직을 쓴다.
지금은 더 내고 덜 받지만, 언젠가는 덜 내고 더 받을 것이다.
어떤 건 아예 해당 안 될지도 모른다. 아동 병원에 입원해 본 적 없고, 아마 보호자가 될 일도 없을 것 같다. 그래도 SickKids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떠올린다. 내가 낸 세금 중 일부가 저 안에서 누군가의 아이를 살리고 있다고.
IV
2월이면 우편함이 두툼해진다. 세금 서류들이 속속 도착한다.
세금 신고 (Tax Return)
1년에 한 번, 이 나라는 나에게 정산서를 요구한다.
한국은 회사에서 연말정산을 해준다. 캐나다는 개인이 직접 한다.
급여 내역서, 은행 이자, 영수증들.
하나씩 정리한다. 몇 번을 확인한다. 제출한다.
마감은 4월 30일.
다른 일 처리는 기다림이 기본인데 세금 결과만 금방 돌아온다. 환급이거나 추가 납부거나.
세금 보고는 복지를 받기 위한 신청서다. 정부는 이걸로 내 상황을 파악한다. 소득이 얼마인지,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신고를 안 하면 챙길 수 있는 혜택도 못 챙긴다.
V
여기는 사보험이 필수가 아니다.
왜일까.
믿는 구석이 국가니까.
아프면 병원에 간다. 실직하면 수당이 나온다. 은퇴하면 연금을 받는다.
국가가 뒷받침한다.
의료보험료 고지서는 없다. 소득세에 포함되어 있다. 실직수당도, 연금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은 보장된다. 그 이상은 개인이 준비한다.
소득세가 많다고 느꼈다. 물건 살 때마다 붙는 13%가 아까웠다. 하지만 결국 여러 개의 사보험료 대신 세금을 내는 셈이다.
완벽하지 않다. 악용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스템은 작동한다. 대부분이 정직하게 내고, 정직하게 쓴다. 그렇게 믿고 싶다.
세금은 믿는 구석에 내는 돈이다.
내가 받거나 나보다 당장 더 필요한 사람이 받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