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 지불하다
"안녕하세요. 밴쿠버 병원에 근무하는 Dr. Lewis입니다. 아버님 상태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세요?"
주말 오후였다. 소파에 기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1-604. 밴쿠버 지역 번호. 발신자 표시에 '병원'이 떴다.
위독하신가. 순간 그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입원 중이셨다. 엄마는 안정적이라고 했는데, 의사가 직접? 토론토에 있는 내게?
손이 떨렸다. 심호흡을 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의사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급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아빠의 현재 상태와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멍했다. 지난달이 떠올랐다. 나는 주치의를 만나기까지 3주가 걸렸다. 대기실에서 1시간, 진료는 5분. 다음 예약을 잡고 나오는 게 전부였다. 전문의는? 몇 달을 기다린다.
그런데 지금 밴쿠버에 있는 의사가 영어가 서툰 보호자인 엄마 대신, 4,000km 떨어진 딸을 찾아 전화를 걸었다. 부모님 곁에 있지 못한다는 죄책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이 전화 한 통으로 당장의 답답함이 해소되었다.
아빠는 응급실과 일반 병실을 합쳐 2주를 병원에서 보냈다. 그중 열흘은 MRI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매일 밴쿠버 시간을 계산하며 전화했다.
"오늘은 MRI 찍었어?"
"아니, 아직."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이어졌다.
병원비는 걱정 없었다. 세금으로 운영되니 당장 목돈을 낼 일이 없다. 응급실도, 입원도, MRI도, 수술도. 청구서조차 오지 않는다. 대신 모두가 같은 줄에 서서 기다린다. 아주 오래.
엄마는 매일 병문안을 가셨지만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었다. 간호 인력이 충분해서 간병인이라는 개념이 없다. 입원 환자는 잘 돌본다. 문제는 진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이다. 그래서 병원은 정말 아픈 사람만 가는 곳이다. 예방 차원의 피로회복 링거도, 영양주사도 없다. 필요한 검사만 하고, 학교나 회사에서 정기검진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건강 관리는 온전히 각자의 몫이다.
며칠 지나자 아빠는 더 이상 서양 음식을 못 드시겠다며 한국 음식을 원하셨다. 엄마가 설렁탕을 싸 가서 1층 카페테리아에서 함께 드셨다고 했다. 식욕은 있으셨다. 위독한 게 아니라 MRI 자리가 나올 때까지 병실에 머물며 경과를 지켜봐야 하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마냥 이어질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 사이 상태가 나빠지는 건 아닐까. 차라리 진료가 빠른 한국으로 모셔야 하는 건 아닐까. 오래 기다린 만큼 더 오래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MRI 결과 큰 문제는 없었다. 한국이었다면 검사부터 치료까지 사흘이면 끝났을 거라고 나중에 들었다.
아빠가 퇴원한 후 엄마와 통화했다.
"요즘엔 어떠셔?”
"많이 나아지셨어. 드디어 병원에서 해방됐다고 좋아하셔.”
“지금 안 계셔?”
“방금 헬스 나가셨어. 앞으로 운동 열심히 할 거래. 기다리는 거 끔찍하다고."
”엄마도 고생 많았어.”
“처음이라 당황했는데 한 번 겪고 나니까 여기 시스템이 이해가 돼.”
의료진도 좋았고 비용 걱정이 없으니 한숨 덜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기다리는 게 너무 싫어서 이제 건강할 때 더 챙기신단다.
돈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없다.
대신 시간으로 지불한다.
Episode
의학에서는 '증상이 발생한 한 번의 사건'을 뜻한다.
증상을 설명할 때 정확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으면 episode를 쓰면 된다.
"My dad had a dizzy episode last week."
"If he has another episode, please call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