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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DoG Oct 29. 2020

다시 한번, 스타일리스트

별생각 없이 학원을 다니던 여름이 끝나가고 학원 수료가 가까워질 즈음, 나는 다시 스타일리스트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내 안에 남아있는 이 미련을 올해는 꼭 떨쳐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일이 잘 안되거나 내 삶이 무료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지금껏 스타일리스트 일을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이제는 그 물음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엔 노련한 사회인으로서 그리고 경력자로써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조급했던 나는 이번에도 학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타일리스트 일에 뛰어들었다. 이번엔 준비도 철저하게 했는데, 미리 압구정 로데오 쪽에 고시원도 잡아놓고, 현장 가방과 대행사 위치를 외워두는 등 철저한 준비를 했다. 이력서를 두세 곳에 넣었는데, 모두 연락이 왔다. 그렇지만 나는 실장님이 직접 바로 전화를 걸어서 면접을 잡은 곳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곳에 비해 열정과 신뢰가 느껴졌던 것 같다. 실제로 면접을 보러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분은 내가 만났던 실장 중에 손에 꼽을 만큼 인성이 바른 분이셨다. 유명아이돌 팀장으로 여러 해 스타일링을 하셨고, 처음엔 패션 잡지사에서 일을 시작하셨다고 했다. 간단할 줄 알았던 면접은 거의 상담을 하듯이 두세 시간 정도 이어졌다. 실장님은 직설적이고 뒤끝 없이 깔끔한 분이셨다. 나에게 바라는 점들을 말해 주셨고, 나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면접을 통해 들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기 - 네가 경력이 있지만 신입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좋겠다. 능동적으로 일할 것 - 나는 신입도 능동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실장에게 의견을 내고, 제안할 줄 아는 막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새로운 트렌드에 항상 민감할 것 - 매일같이 새로운 트렌드에 대해 알아보기를 즐겼으면 좋겠다. 비싸지 않아도 됨. 거짓말은 안 됨 - 차라리 솔직하게 말을 하는 게 좋다. 실장님은 생각보다 쿨하시다. 모르는 것을 넘어가는 걸 용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 번 더 물어봐라. 일을 두 번 하는 걸 싫어하신다. 일은 굉장히 바쁠 것이니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자세로 왔으면 좋겠다. 시간 약속은 기본 - 아무리 바빠도 시간 약속을 지키는 건 기본이다. 아프지 말고 항상 따뜻하게 입고. 이 옷에 대해 잘 몰라도, 알아가려는 노력이 있다면 오케이. 놀 땐 놀고 일할 땐 일한다. 막내이지만 막내에서만 머무는 고인 물은 용서할 수 없다. 네가 책임지는 일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노력해서 발전하는 모습을 기대한다. 그리고 메모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이정도가 내가 K 실장님과 면접을 하고 나서 적어 놓은 글이다. 옛 메모를 찾아가며 다시금 적다 보니 새삼 실장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처음 며칠은 팀원이 한 명도 없어서 나와 실장님 둘이서만 일을 했다. 실장님은 이미 팀원 계획이 있으셨고, 그 계획의 일환으로 나를 뽑은 것이었다. 남자 팀장급 한 명을 스카우트하셨고, 여자 드라마 현장 책임져줄 팀원을 스카우트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이 오기 전까지는 둘이서 일을 해야 했고, 나는 결국 남자 팀장이 오기도 전에 그만두게 되어서, 실장님의 계획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K 실장님이 담당하는 연예인은 배우 H와 그외 몇몇의 배우들, 그리고 F기획사 신인 남자 아이돌이었다. 당시 그 그룹은 데뷔도 안한 상태였고, 내가 면접을 볼 때 처음으로 F기획사 보이그룹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H의 드라마가 방영 중이었고, H가 꽤나 비중 있는 인물로 출연 중이었기에 일이 꽤나 많았다. 나의 첫 스케줄은 픽업과 반납이었고, 처음 며칠은 실장님과 함께 다녔다. H 님과의 피팅도 했는데, 어리버리 할 줄 알았던 내가 꽤나 잘 해서 실장님이 칭찬을 해주시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보이그룹이 데뷔 준비에 박차를 가하자 우리 둘로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단기 알바로 인원을 메꾸고 데뷔 준비를 했는데, 그것도 벅차서 알바로 팀원을 늘려갔다. 데뷔하기도 전인 신인을 맡는다는 건 긴장이 되었다. 게다가 가장 주목받는 기획사인 F엔터에서 새롭게 나오는 신인인 만큼 어떤 그룹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궁금증도 잠시였고 네 명의 스타일리스트는 일에 떠밀려 죽을 둥 살 둥 일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의상 시안을 보내줬는데, 죄다 슈프림 착장이었고, 우린 슈프림을 구하기 위해 홍대 구석구석을 뒤져가며 슈프림을 긁어모았다. 첫 피팅 날에 모두가 긴장한 채 사옥에 들어가서 옷을 걸어 놓고 있는데, 회사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아 했고, 생전 처음 해보는 마네킹 피팅을 몇 착 해보더니 지적만 잔뜩 하고 “내일 다시 피팅 보겠다” 라고 선언한 뒤 우릴 돌려보냈다. 실장님은 아마 그때부터 회사와 잘 안 맞았던 것 같다.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을 주고서는 착 이 바뀌어 있기를 기대하는 회사와 실질적으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스타일리스트는 매번 부딪혔다. 피팅은 매번 그런 식이었다. 한 착을 최소 3번 이상, 매일같이 피팅을 보았고, 매일같이 짐을 싸고 사옥에 가서 짐을 푸는데 모두 지칠 대로 지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나는 회사 직원과 단둘이 일본으로 사입을 가게 되었다. 일본에 갑작스럽게 가게 된 게 처음은 아니지만 항상 당황스럽다. 하루 전에 여권을 받아 가더니 다음날 새벽에 공항에 가 있었다.


정말 가기 싫었지만 막상 회사 직원분과 함께하는 일본 사입은 여유로웠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긴장감은 흘렀지만 평화로운 2박 3일이었다. 회사가 확실히 돈이 많아서 그런지 호텔도 좋은 곳, 심지어 각방으로 잡아주고(이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식비와 사입비도 넉넉하게 챙겨준 듯했다. 오랜만의 나 홀로 넓은 침대와 깨끗한 방에서 넉넉하게 먹고, 잠도 편히 잤다. 낮에는 느지막이 일어나서 도쿄 골목을 누비며 슈프림 사입을 진행했다. 회사 직원분이 콘셉트와 의상 느낌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지만 나는 정말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마 그들도 같은 말을 하면서 서로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직원분이 엄청 친절하게 그냥 형이라고 부르라고 하셔서 처음엔 어색했지만 사입이 마무리되어갈 즘 아쉽기까지 했다. 공항으로 이동하는 길에 둘 다 다가올 폭풍에 대비하듯이 장엄한 표정을 유지했고, 도착하자마자 저녁에 피팅이 있다는 소식은 더욱더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피팅이 끝난 후 실장님은 일본 사입해온 옷이 너무 적고, 별로라며 어떤 샵을 갔고, 어떻게 사입했는지 여쭤보셨다. 사실 우리는 시안의 느낌을 각자 느끼며 옷을 사입했고, 최종 컨펌을 회사에 받았기 때문에 결국 회사가 고른 옷이라고 말씀드렸다. 그 후로도 피팅은 거의 매일같이 진행되었고, 그 와중에 H의 드라마와 온갖 화보 촬영 스케줄이 우릴 괴롭혔다. 나는 사실 촬영만 들어가면 좀 더 나을 줄 알았다. 촬영은 이미 정해진 책으로 진행될 거니까 지옥 같은 피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막상 촬영에 들어가고 나니 나는 거의 촬영장 모니터 붙박이가 되어야 했다. 모두가 초면인 촬영장에서는 더욱 신경 쓸 것도 많았다. 인사를 잘해야 했고, 일이 없어도 일하는 척 모션을 취해야 했고,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모니터 앞에 서서 뚫어져라 모니터링을 해야 했다. 또 뒤에서는 다음 착을 준비하거나 다음 착장 피팅을 보았기 때문에 보통 모니터 앞은 내가 지켰다.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면서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없어졌다. 첫 촬영은 남양주의 한 스튜디오에서 했는데, 새벽 4시부터 새벽 4시까지 꼬박 24시간을 촬영했다. 그때부터 지옥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한 번은 촬영이 끝나고 사무실에 왔는데, 다음날 모델 화보 촬영할 때 입을 옷이 없어서 동대문에 가야 했다. 결국 밤을 꼬박 새우고 동대문에 다녀온 후 바로 다음 촬영을 갔고, 모니터를 보려고 벽에 머리를 기댄 채 꾸벅꾸벅 졸았다. 몸이 힘들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일을 많이 놓쳤다. 실장님께 야단도 맞다 보니 내가 이 일을 왜 다시 하고 싶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마침 연말이었고, 새해에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것만 그만두면 멋진 일을 할 수 있고, 예전의 여유로운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두가 힘들고 바빠서 나 하나 빠지는 게 너무 미안했던 나는 꾀를 냈다. 군대 핑계를 대면서, 나는 팀에서 빠졌다. 정말 효과적인 이유였지만 그만큼 리스크도 컸다. 그것은 거짓말이었고, 나는 다시는 스타일리스트 일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앞으로 2년 동안은 어쨌든 군대에 가있는 척을 해야 했기에 하고 싶어도 스타일리스트 일을 시작할 수 없게 했다. 이번엔 실장님은 좋았지만 나와 잘 맞지 않았던 선배와, 회사의 갑질이 나를 지치게 했다. 약 한달 동안 열심히 일을 해보고 나니 후련했다. 이제 스타일리스트 일에 미련이 없다. 그렇게 훌훌 미련을 털고 나니 크리스마스였다. 스타일리스트 일을 마무리하며 길었던 한해도 어느새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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