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연말을 신나게 보내고,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군대는 신청했으나 떨어져서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다. 그리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군대를 생각 없이 신청했던 것에 분노하며, 올해를 어떻게 의미 있게 채울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저런 계획만 세우고,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나에게 친구가 제안을 했다. 동생들과 함께 여행을 가보라고, 생각해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부모님도 흔쾌히 지원을 해주셨고,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일본으로 일주일간 여행을 가게 되었다. 여행 계획과 실행은 내가 도맡아 했는데, 알찬 여행을 시켜주고 싶은 나머지 무리한 일정을 짜게 되었다. 일주일 동안 후쿠오카 -> 오사카(고베) -> 도쿄를 거치는 일정을 준비했고, 지금 생각해 보면 무리한 일정 때문에 뛰어다녔던 기억만 남아있다.
첫날 공항에 가는 길은 새벽인 나머지 너무 춥고 어두웠다. 난생처음 동생들과 여행을 한다는 마음에 책임감과 설렘이 교차했다. 그러나 나는 후쿠오카에서 길을 잃었고, 로밍도 안 한 것에 대해 후회했다. 결국 로밍 신청을 하고 힘겹게 숙소에 도착했는데, 우리 모두 지친 나머지 좁은 숙소에서 그대로 뻗어 잠에 들었다. 일어나 보니 새벽 3시였고, 첫 일정부터 대단히 꼬였다. 결국 아침 일찍 일어나서 후쿠오카 구경을 나갔다. 나도 후쿠오카는 처음이라 생소했는데, 생각만큼 볼거리가 많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은 최악이었다. 새벽 버스를 타고 오사카로 이동하는 일정이었는데, 나는 새벽 버스가 낭만이 있을 줄 알았다. 내심 기대하고 버스에 탑승했으나 현실은 처참했다.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아침 일곱시에 고베에 내렸는데, 숙소는 아직 체크인 전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편의점을 전전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숙소에 들어갔고, 숙소에서 한참 동안 쉬었다.
다음날엔 오사카 패스를 이용해서 관광지를 누볐는데, 동생이 패스를 잃어버려서 혜택을 거의 못 받았다. 유명 관람차부터, 아쿠아리움까지 하루 종일 관람을 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이게 진짜 여행인 것 같았다. 그동안 우리는 캐리어를 끌고 숙소 이동하기에 급급했는데, 다시는 이런 계획을 짜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했다. 다음 일정은 도쿄였는데, 어김없이 새벽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두 번째라 익숙해서였는지 잠을 편하게 잤고, 숙소도 편하게 찾을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숙소는 갈수록 시설이 좋아졌다. 후쿠오카의 숙소는 고시원을 크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곳이었고, 고베 숙소는 일반적인 게스트 하우스였으며, 오사카 숙소는 캡슐호텔이었고, 도쿄의 숙소는 시설 좋은 원룸이었다. 동생들은 무리한 일정에 지쳤는지 더 이상의 관광을 거부했고, 나는 도쿄에 와서 도쿄타워를 꼭 보고 싶었던 마음에 괜히 화를 내기도 했다. 결국 나는 혼자 도쿄타워를 보러 갔고, 다음날엔 마지막 도쿄를 즐기기 위해 동생들과 쇼핑을 나갔다. 역시 돈을 쓰는 게 재미가 있는 것 같다.
평화롭게 쇼핑을 마치고, 공항버스를 타기까지 시간이 남아서 햄버거 가게에서 밥을 먹었다. 슬슬 떠나야 할 때가 되어 숙소에 가서 체크아웃을 하고, 공항버스를 타기 위해 도쿄역으로 이동하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살짝 촉박했다. 그러나 무사히 도쿄역까지 도착했고, 이제 공항버스만 찾으면 되는데...! 도쿄역이 정말 컸다. 도대체 어디서 버스를 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항버스 표지판을 따라가보니 그곳이 아니라는 답변만 받았고, 버스 출발시간까지 15분 정도를 남겨두고 다시 원점이 되었다. 역 직원 같은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반대편이라는 답변만 들었고, 우리는 바퀴가 고장 나 소리가 엄청 크게 나는 캐리어를 끌고 도쿄역을 가로지르며 달렸다. 하지만 그곳도 우리가 찾는 버스가 아니었고, 시간은 어느덧 출발 5분 전이었다.
나는 맨 앞에서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뒤로 우현이, 수현이가 죽어라고 나를 따라 달렸고, 동생들은 그때 죽을뻔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날 도쿄역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보았을 것이다. 어린애 세명이 덜컹덜컹 캐리어를 끌고 도쿄역에서 뜀박질을 했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시간을 보니 이미 출발시간이 10분이나 지나있었다. 그래도 그 버스를 놓치면 공항에 못 가고, 그러면 내일 출발하는 비행기를 못 탄다고 생각하니 계속해서 달렸다. 모두가 지쳐서 헉헉거렸을 때, 맞은편에 버스 터미널이 보였다. 조금 허름했지만 공항 가는 버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이 맞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만약 그곳이 아니라면 포기하고 다른 버스를 예매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곳은 우리가 타는 버스가 오는 곳이었다. 물론 우리가 예약한 차는 이미 떠났고, 역장이 우리 표를 보더니 다른 교환권을 주면서 다음 차를 타라고 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 온몸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동생들을 보는데, 그들도 나와 똑같이 땀에 쩔어있었다. 그 상황이 너무 웃겼다. 고작 버스가 뭐라고 이렇게 뛰었나... 햄버거를 먹으며 여유 부리던 몇 시간 전의 우리는 왜 이렇게 땀에 쩔어있나... 땀이 다 식고 진정이 될 쯤 공항버스를 탈수 있었다. 공항 주변에 호텔을 잡아 놓았기 때문에 편안하게 숙소에 들어갔다. 숙소는 우리가 이제껏 머문 곳 중에 가장 좋았고, 그날 힘들어서였는지 다들 굉장히 만족했다. 다음부터는 무조건 호텔로 숙소를 잡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저녁으로는 주변 편의점을 털어서 사온 먹거리로 때웠는데, 웬만한 저녁 식비를 넘어서는 지출을 했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는 꼭 편의점을 털어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동생들에게 이번 일본 여행이 어떻게 남았을지는 모르겠다. 아마 힘들고 무리한 여행에, 도쿄역을 뛰어다닌 기억이 지배적이겠지만, 나는 이번 여행이 퍽 재미있었다. 혼자 오는 것보다 함께 오니 모든 곳들에 추억이 깃든 느낌이라 새롭고, 지겨울 틈이 없어서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