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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작

제 손으로 밥 벌고 노동하는 건 나도 타인도 이해하는 일

by 조용한 언니

10월이 저무는 어느 저녁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따뜻한 이불 속에 누워 확인하니 알바 면접 요청이었다. 그동안 몇 번의 면접 신청을 거절했다. 일하러 가는 동네가 강남이어서, 아이가 너무 어려서, 혹은 아이 반찬을 만들어야 해서 ‘요청은 감사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엔 집과 멀지 않은 동네에 돌 볼 아이도 초등학생이었다. 시터 등록만 해놓고 면접 한번 한 적이 없어서 되든 안 되든 하자 싶어 문자로 약속을 잡았다. 면접 시간은 부모가 퇴근 후에 해야 하니 저녁 8시로 했다.

다음 날, 초행길이라 일찍 나섰더니 시간이 20분이나 남았다. 이르게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두운 아파트 단지 안을 한 바퀴 도는데 문자가 왔다. 퇴근해 집에 있으니 일찍 도착하셨으면 오라고 한다. 답을 한 후 13층에 있는 집으로 갔다. 현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는데 젊은 남자다. 나는 면접용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한 후 ‘어머니는 아직 퇴근 전이신가 봐요’라고 했다. 아이 아빠로 짐작되는 젊은 남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그러나 미소를 지으며

"저랑 아이랑 둘입니다, 우리 둘이 살아요. 제가 혼자 키우고 있어요."

라고 말했다. 내 눈엔 채 마흔이 안되어 보이는 아이 아버지는 여전히 웃으면서 주스를 한 잔 따라 내밀었다. 감춰지지 않았을 머쓱함을 감추며 나도 따라 웃었다. 맨날 정상성 타파를 잘난 체하며 외치면서,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차별하는지 떠드는 주제에 당연한 듯 엄마를 찾는 덜떨어진 나라니. 그 뒤로 서로 확인할 것들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채용되었다. 이 일을 하려고 맘먹으면서 서너 번은 면접에서 떨어지겠지 싶었다. 일을 하게 되면 나는 경험한 적 없는 세계,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의 삶을 조금은 알게 되겠지 싶었다. 그런데 모든 예상은 어긋나고 싱글대디의 8살 남자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주말을 제외한 매일 저녁 6시, 아이를 데리러 초등 돌봄 교실로 간다. 그림그리기와 줄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낯을 많이 가리고 목소리가 작아서 이야기를 나누려면 바싹 다가가야 한다. 첫날 일곱 살부터 그린 온갖 그림을 보여줬다. 입체적으로 그린 탱크와 자동차를 보고 놀랐는데 손흥민과 추신수, 이승엽 선수를 그린 연필 드로잉을 보고는 더 놀랐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만나지 못한 미술 영재를 돌봄 알바에서 만난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십여 분의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동안은 돌아오는 내내 '한국을 빛난 100명의 위인'을 계속 불렀다. 얼마 전 드디어 다 외웠다고 자랑해서 처음 나오는 위인이랑 마지막 위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단군과 이중섭이라고 했다. 이중섭은 화가 아니냐고 했더니 맞다고, 소를 그린 화가라고 친절하게 약간은 뽐내며 알려줬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책상에 앉아 영어와 수학, 국어 학습지를 푸는 아이는 혼자 공부하고 혼자 노는 게 익숙한 거 같았는데 어느 날은 여러 명의 친구와 자전거 타기 약속을 정하려고 통화를 오래 하기도 했다. 만난 지 겨우 이틀이 지나자 줄넘기의 다양한 기술을 내 앞에서 시연하다가 땀을 뻘뻘 흘렸다. 그림도 잘 그리는데 줄넘기까지 잘하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손뼉 치며 너스레를 한참 떨었다. 미술 영재급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는 줄넘기도 좋아하고 자전거와 노래도 좋아한다. 그림을 잘 그리지만 그림만 잘하지 않아서 이것저것 좋아하는 것이 많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매일 할 일이 생겼다. 적지만 돈을 벌고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머리로 아는 것을 삶의 태도와 행동으로 가져오기까지 사람은 몸으로 경험하고 배워야 하는 족속 같다. 책 몇 줄 더 읽었다고 젠체 말아야지. 다른 이의 어설픈 잘난 척도 넘겨줘야지 하는 마음도 쥐꼬리만큼 생겼다. 제 손으로 밥 벌고 노동하는 건 나도 타인도 이해하는 일 같다.

이야기가있는그림_12월그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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