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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구하면서 알아가는 것

허영이라 불러도 돈이 되지 않더라도

by 조용한 언니


올 거 같지 않던 가을이 오고 나는 아직 알바를 구하고 있다. 드물지만 직접 연락이 오기도 한다. 중간에 있는 업체를 거치지 않고 아이 부모가 인터뷰를 요청하는 경우다. 무응답이 3회 이상이 되면 벌점이 있어 연락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거리가 멀다거나 시간이 맞지 않다고 메시지를 보낸다.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에 길면 4시간, 짧으면 2시간 하는 시터 알바는 지금 하는 드로잉 강사를 관두지 않고도 할 수 있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계속할 수 있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신생아를 돌보는 일도 있지만 아이를 낳아본 적도, 조카를 돌본 적도 없어 갓난쟁이를 돌본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 아이를 낳고 많은 조카를 돌봤어도 신생아를 보는 일은 어렵고 힘들고 또 어렵고 힘든 일이다. 아이를 둔 아마도 젊은 부모가 시터라고 부르는 아이돌봄 알바를 고용하는 시간을 보면 아침 7시에서 9시, 그리고 오후 4시에서 7시가 가장 많다. 맞벌이 부모가 출근을 준비하는 동안 자는 아이를 깨우고 씻기고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혀서 어린이집에 보내는 일과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돌아와 부모가 퇴근하는 사이의 시간을 시터에게 맡긴다. 전업주부라도 쌍둥이나 나이 차가 많지 않은 아이를 동시에 돌봐야 하면 시터를 고용하기도 한다. 서울에 살면서 아파트에 거주하는 중산층 생활 수준을 가진 3040 부모들이 아이 돌봄을 원하는 시간대를 보면서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여성의 생활이 전부는 아니지만 아주 조금 그려지기도 한다.


일을 구하는 사이, 적지만 드로잉 수업을 하러 다니고 몇 년째 하는 별자리 일력 원고를 마감했다. 여전히 늘 하던 일을 하고 친구 둘을 각각 다른 날 만나서 같은 전시도 두 번 보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여서 두 번 보아도 두 배로 더 좋았다. 소박한 연필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벌교로 귀촌했는데 아이를 키우느라 그림 작업에 따로 시간 내기도 힘들고 시골살이에 재료 구하기도 만만치 않아 가장 간편한 재료인 연필로 구하기 쉬운 재료인 종이에 그림을 그린다. 작가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하늘과 산 사이, 나무와 강과 풀 사이에 아이를 업거나 안고 있는 인물이 작게 그려져 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여성도, 도시살이를 벗어나 시골로 간 여성도 아이를 키우느라 다들 여념이 없다.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 전전긍긍하며 시터를 고용하거나 집에서 내내 아이를 보면서 시간을 쪼개어 그림을 그린다. 서울에 사는 예술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늙수그레한 나는 아이도 키워본 적 없으면서 작업을 계속하려고 돌봄 알바를 구한다. 서울에 살거나 시골에 살거나, 결혼 하거나 안 하거나, 아이가 있거나 없거나, 여성의 세계는 이렇게 연결이 되는 건가 하는 하릴없는 생각을 잠시 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에게 나의 근황을 전했다. 나의 작업을 늘 응원하는 한 친구가 조금 걱정스러운 기색을 비쳐서 시터 알바를 구하는 시간대를 보면 나는 경험 하지 못한 세계가 조금 보이고 그건 그것대로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친구는 한창 아이를 키우던 시절, 퇴근 무렵이면 늘 불안하던 마음을 이야기했다. 친구에게 이런 속내를 들은 적은 처음이라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같은 전시를 본 또 한 친구와는 돈벌이의 어려움과 지겨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친구는 지방 소도시에서 책방을 하는데, 돈벌이가 되지 않는, 그러나 중노동인 책방을 문 닫지 못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종종 생각한다고 했다. 친구의 그 마음과 내가 예술 작업을 붙들고 있는 마음은 어딘지 닮은 것 같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마음을 허영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돈이 되지 않더라도 정체성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사람도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일을 구하면서 나에 대해 알아간다. 아마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아직 모르고 있던 나를 더 알 수 있겠지. 삶은 종종 엉뚱한 곳에서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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