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업실
간혹 사람들에게 작업실이 어디냐는 질문을 듣는다. 각종 그림 재료와 도구들, 쌓인 책들과 오랜 시간 묵혀 만들어진 취향의 공간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여 나의 작업실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파트의 작은 방이다. 옷장과 책장이 있고 여러 가지 물건들이 쌓인 방이 내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작업 공간이다. 당연히 여기서 매일 잠도 잔다. 이미 오래전 포화상태가 된 내 방은 책장 안은 물론 책이 꽂힌 책장과 책장 사이 빈틈에도 책이 있고 책장 위 천정까지 책이 있다. 책의 분야도 인문교양에서 문학, 그림책, 명리와 타로, 사화과학과 철학까지 마구 뒤섞여서 나의 산만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꽂힌 책들 앞에는 물감 통과 오래된 음악시디가 나란히 있다. 컴퓨터 책상과 그림을 그리는 작업대 아래에도 책과 그림재료와 도구들이 두서없이 쌓여 있다. 그동안 그린 그림들도 방 안 구석구석 여기저기에 있다. 문구 파일에 정리해 두긴 하지만 예전 작업한 그림을 찾으려면 방을 뒤집어야 가능하다.
오래전 첫 그림책 작업을 할 땐 밥상을 펴고 그림을 그렸다. 손님이 오면 펴는 교자상을 작업 책상 대신 사용했는데 거기서 그림을 그리다가 허리가 상했다. 그 뒤 책상을 사고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린다. 작업실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다달이 낼 월세를 생각하면 월세를 벌러 다니느라 작업실에는 못 갈 거 같았다. 가끔 전시를 보러 미술관에 갈 때에는 걸린 작품들을 감상하기보다 이렇게 큰 작업을 하려면 작업실은 얼마나 커야 할까를 상상한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 달까. 예술가의 작품 앞에서 성찰과 사유 대신 나는 이런 옹색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규모 있는 미술 작업은 그만큼 큰 공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전시 후 보관할 공간까지 생각한다면 미술 작업을 위해 더 많은 경제적 자원이 필요하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공간을 위한 목돈이 필요하다.
정리 전문가란 이가 하는 유튜브를 우연히 보다가 혼자 발끈한 적이 있다. 그 정리 전문가의 말인즉 성공하는 사람은 정리정돈을 잘하고 집 안이 깔끔한 반면 지저분하고 게으른, 정리정돈을 못하는 이는 가난하다고 했다. 불쾌하고 정치적으로도 올바르지 못할뿐더러 편견으로 가득 찬 발언이었다. 정리가 잘 되어 단정하고 말끔한 방과 작업실은 넉넉한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전월세 집값상승과 혹은 하강으로 늘 난리법석인 이 나라에서 대부분 사람들에게 실현되기 어려운, 적어도 나에겐 힘든 꿈이다. 집에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가사와 돌봄 노동의 호출을 계속 받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여성작가의 글은 주방 식탁에서 탄생한다고 한다. 글쓰기는 공책과 연필, 요즘에는 노트북을 놓을 공간이면 되지만 그림 작업이 되면 좀 복잡해진다. 물론 글을 쓰는 작가도 조용하고 쾌적한 작업실이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집에서 작업하는 동시에 재생산 노동을 하는 여러 여성 작가들은 어디서 그림을 그릴까. 마음 편히 그림 재료들을 늘어놓고 작업할 공간이 늘 요원하다. 예전 좁은 원룸에 사는 작가가 공중에 걸린 옷들 사이로 납작 엎드려 그림 작업 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또 주거를 해결하는 좁은 오피스텔에 자신이 만든 인물 입상을 장승처럼 세워놓은 작가도 본 적 있다. 다들 자신의 공간에서 알음알음 작업을 하고 생계노동까지 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작업실은 삶과 일상이 묻어나는 집 안, 혹은 거리,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밥 벌러 다니는 모든 공간일 수 있다.
코로나 팬더믹 이후 외부 일거리가 뚝 끊긴 나 역시 집 안에서 종종 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생계형 글쓰기를 한다. 내 방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정신 사나워지는 중이다. 이 정신 사나움이 내 작업의 이력, 혹은 열정이라면 얼마나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