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도 다시 덤덤히 살아가는 씩씩함
실업의 나날은 길어지고 우리 집엔 아버지 동료들이 와서 문 닫은 공장과 흉흉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술을 마셨다. 그 무렵 내가 태어나 한 번도 바뀌지 않던 대통령 박정희도 죽었다. 어디에 탱크가 왔다고도 하고 양심수가 어떠니, 사상범이 어떠니 하는 말들도 했는데 나는 양심수가 무어냐고 아빠에게 물어봤다. 내가 학교에서 배운 양심은 바르고 착한 마음인데 감옥에 가는 나쁜 사람에게 양심이라는 좋은 말이 붙는지 이상했다. 아빠는 우리나라는 미국처럼 자유민주주의 국가인데 양심수는 그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북한의 생각이라서 사람을 때리지도, 돈을 훔치지도 않았지만 사회주의라는 생각 때문에 감옥에 간다고 했다. 그저 생각뿐인데 자기 마음이 믿는 그 생각 때문에 왜 감옥에 가는지 어린 나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쟁을 겪은 세대, 새마을 운동과 산업화 시대를 거친 수출의 역군이던 이 세대 아버지들처럼 아빠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 귀가했지만 더러 일요일엔 같이 야구를 하고 산책을 했다. 아빠는 종알거리는 내 이야기에 자주 웃었고 물어보는 어떤 질문에도 답을 해줬다. 어느 날은 동네 절에 갔다가 불상의 늘어진 귀를 보며 부처님 귀는 왜 저렇게 크고 기냐고 했더니 부처님 아들도 너처럼 맨날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부처님 귀를 잡아당기며 졸라서 그렇게 됐다고 했다. 요즘도 절에 가서 부처상을 보면 아빠가 해준 이야기가 생각나 배시시 웃음이 난다.
그 뒤로 아버지는 옷 만드는 공장 몇몇 곳에서 일하다가 자기 공장을 차렸다. 아버지가 자기 공장을 운영하던 시기는 나의 십 대와 대학 시절과 맞닿아 있고 한국 사회의 경제 호황기와 겹친다. 종종 미술 대학을 나온 내가 부잣집 딸이라거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거라고 단정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가난이 과거와 지금 나의 정체성을 압도하진 않는데 그런 것이 부잣집 딸이라면 맞는 말이다. 비빌 언덕이라곤 하나 없는 조실부모한 두 사람, 엄마와 아버지가 어떻게 서울살이를 견디며 동생과 나를 키웠는지 나는 잘 모른다. 이 잘 모를 수 있음이 부잣집 딸이면 그 역시 맞는 말이다.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 무렵 십 년 넘게 운영하던 공장에 불이 난 후 곧 공장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다. 이 모든 일은 아엠에프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벌어졌고 공장만 넘어갔을 뿐 빚은 그대로여서 집으로 여러 은행에서 독촉장이 날아왔다. 아버지는 슬퍼하거나 절망할 틈도 없이 그 당시 중국에 들어서기 시작한 봉제 공장의 관리자로 다시 일하러 갔다.
90년대 후반, 중국으로 가는 아버지의 허름한 가방 안엔 잡다한 짐들과 함께 오래전 출간되어 낡은 이효석 단편집이 늘 끼여 있었다. 원단 먼지 날리는 공장의 재단사 아버지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내가 그림을 그리거나 동생이 문학을 전공한 것을 기뻐했다. 예술하는 사람에 대한 동경이 노동자 아버지에게 있었던 모양이었다. 중국 여기저기 공장에서 일하던 중년의 아버지는 노년이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대한민국 남성 노동자들의 마지막 일자리인 경비 노동자가 되어 다시 십 년 넘게 일했다.
내 아버지는 내내 일하는 사람, 쌓아왔던 삶이 무너지고 일의 이력이 허물어져도 다시 무엇이 되든 간에 일자리를 찾아 쉼 없이 노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스스로에게 갖는 자부심은 노동자이기 전에 당신이 기술 좋은 재단사라는 것, 일솜씨가 꼼꼼하다는 것이다. 노동자라는 정체성과 기술 좋은 기술자라는 자부심 사이의 거리가 뭐가 그리 먼가 싶기도 하다. 터진 옷 솔기를 꿰매거나 날렵하게 바지선을 다릴 줄 아는 이는 우리 집에선 엄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말수 적고 무뚝뚝하지만 나에겐 다정한 아버지 39년생 제영근 옹 덕분에 나는 노동하는 삶의 건강함과 무너져도 다시 덤덤히 살아가는 씩씩함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