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용한 언니 Aug 29. 2024

나의 아버지

고향을 떠나 희망을 찾아 떠 돈 

 요 몇 년 주로 집에 있다. 밖으로 돌아다니며 협업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활동하던 일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두 끊겼다. 창궐하는 코비드 19 바이러스도 한몫했다. 집에 있는 시간은 팔순의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인데 드물게 평화롭고 더 자주 나의 바닥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양육하는 여성들이 사랑하는 아이, 그러나 나를 미치게 만드는 아이 때문에 전엔 알지 못하던 자신의 바닥과 마주한다는데 나는 나를 돌봐주던 두 사람, 늙은 부모와 붙어 있으면서 내가 얼마나 성마르고 옹색한 인간이지 확인한다.


 노년에 이르러 귀가 어두워진 아버지는 점점 더 고요히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간 것 같다. 일상의 소소한 소통에 애가 타는 건 가사와 집안일을 처리하는 엄마와 나의 몫이다. 내가 밖으로 싸돌아다니던 시절엔 알 수 없었던 과묵하고 방어적인 남자와 사는 여자, 엄마의 어려움은 내 어려움이 되었다. 반응이 크고 빠른 엄마와 느리고 말이 없는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부터 자주 충돌하고 갈등했다. 이젠 늙어 힘에 부친 엄마보다 아버지와 부딪히는 건 내가 되었다. 귀가 어두운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려면 목소리를 키워야 하는데 큰소리로 말하다 보면 화 날 일이 아님에도 화가 난다. 귀가 어둔 노인들은 잘 들리지 않으니 목소리가 커지던데 아버지는 내 큰 소리에도 늘 조용하다. 일방적으로 나 혼자 큰소리를 내다가 벌컥 화를 내고 싱겁게 끝난다. 그래도 귀가 어두운 노년의 아버지와 갱년기 열감이 오르내리는 중년의 딸은 예전엔 다정한 아빠와 순한 어린 딸이었다. 


 아빠는 재단사였는데 옷본이 그려진 종이를 뒤로 해서 스케치북처럼 묶어 집으로 가져왔다. 지금으로 치자면 이면지 활용인데 나는 그 종이에 상상 속 공주를 그리고 놀았다. 당시 아버지가 다니던 공장은 가발로 유명한 공장으로 옷도 만들었다. 아버지가 그 공장에서 일하면서 우리 집은 인천에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됐다. 인천보다 비싼 집값에 당장 살 집을 구하지 못해 공장 여자 기숙사의 쓰지 않은 매점을 빌려 잠시 살았었다. 그곳에 사는 동안 공장언니와 아저씨들이 우리 집에 와서 자주 밥을 먹었다. 언니와 아저씨들은 엄마의 계란말이를 좋아했고 엄마는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공장언니들에게 새로운 김치찌개 비법을 배웠다. 오직 멸치만 깔고 신 김치를 넣어 식용유를 한 바퀴 둘러 오래 끓이면 되는데 3교대 야간 조 작업을 마치고 나온 여공들이 우르르 둘러앉아 먹던 김치찌개가 맛나 보였다고 한다. 아빠는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수출에 공을 세웠다고 상도 받고 일본에 연수도 다녀왔다. 일본에 가기 전에 동생과 나를 공장과 동네 여기저기에 세워 두고 사진을 찍었다. 일본에 가서 보고 싶을 때마다 본다는 게 이유였는데 출장기간은 겨우 보름이었다. 

 

경상남도 바닷가 출신인 아빠와 엄마는 고향을 떠나 서울과 인천을 떠돌았다. 그러다 제대로 된 서울의 큰 직장에서 일하게 되어 기대에 부풀었지만 희망의 시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공장 사장이 미국으로 도피하고 공장에선 내내 시위가 있었다. 우리 집에 와서 밥을 먹던 언니와 아저씨들은 데모를 하러 가고 아빠는 말리러 다녔다. 그러다 어느 날 누가 떨어져 죽었다고 했고 공장은 경찰이 에워쌌다. 기자들도 몰려왔다는데 아무것도 모르던 동생은 텔레비전에 나온다며 공장 앞으로 구경을 갔다. 그 뒤 아버지는 한동안 실업의 나날을 보냈다.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졌는데 그 공장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시위를 주도하기는커녕 소극적으로도 가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노동자적인 각성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 말로는 착한 아이들, 그러니까 공장 언니와 아저씨들이 교회만 다니면 다들 빨간 물이 든다고 했다. 그 교회가 도시산업 선교회라는 건 대학에 가서 노동 운동사를 공부하며 알게 되었다. 

*11월호에 이어집니다. 



이전 09화 여름에 만나는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