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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Sep 12. 2024

여전히 삐딱하게, 그러나 내 걸음대로

각자 인생 제 생긴 대로 살다 가면 그뿐

 얼마 전 친구와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오고 가는 길 즐거운 수다 중에 친구는 나에게 그동안 쓴 글을 엮거나 새롭게 글을 써보라고 했다. 독립출판도 좋으니 개성 있는 책을 만들어 보라면서 인기 있는 출판물을 추천해 줬다. 친구는 내가 좋아하거나 자신 있는 걸로 글을 써보면 어떻겠냐며 상냥하게 제안했는데 나는 시큰둥하게 ‘아무튼 삐딱하게’ 라면 자신 있다고 했다.


 삐딱하게, 부정적인 시선이라면 남부럽지 않은 나는 올 한 해가 다가는 요즘 새삼 내 나이를 헤아리다가 이렇게 계속 매사 부정적인 기운 가득하게 살아도 되나 생각하곤 한다. 어느 곳에 가든 어떤 상황에 부딪히든 사람 사이 관계 맺기에서도 좋은 말로 하자면 비판적인 나는 종종 불평불만 가득한 불순분자가 되곤 하다. 갱년기 증상과 중년의 우울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엔 이렇게 늙다간 신경질적이고 사랑 없는 앙상한 할머니가 될까 두렵기도 했다. 긍정문보다 부정문을 자주 사용하고 되는 이유보다 안 되는 이유를 먼저 찾는 사람, 화합보단 늘 뾰족하게 선을 긋는 사람으로 곁에 아무도 없는 늙은 여자 사람이 곧 닥칠 미래의 내 모습 같았다. 그런데 할머니는 다 푸근하고 품어주기만 해야 하나. 할머니도 사람인데 호불호가 있고 시시비비도 따질 땐 따져야지 말이다. 어떤 이들은 그냥 나이만 먹으면 ‘노인’이고 제대로 시간의 무게를 견디고 성숙해지면 ‘어른’이라고 한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 인생의 멘토가 없다고들 하는데 각자 인생 제 생긴 대로 살다 가면 그뿐이지 어른이고 스승은 뭔가 싶었다. 늙음은 늙음대로 존중받아야지, 성숙이니 큰 어른이니 하는 건 또 다른 나이주의 같았다. 젊은 사람이 왜 패기가 없냐고 하거나 젊은데 꿈도 없냐는 거나, 늙으면 나이 값을 하라거나 곱게 늙으라고 하는 건 나이와 세대에 대한 편견 가득한 이데올로기다. 늙는다고 다 지혜롭고 품이 넓어지는 건 아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나를 보면 알 수 있다.


 난 여전히 불안하고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며 자주 삐치면서 아닌 척한다. 다만 나이가 드니 불안과 예민함, 삐침의 밀도가 옅어지긴 하는데 이건 내가 성숙해져서가 아니라 순전히 노화에 다른 체력고갈이다. 팽팽하게 조여진 신경과 감정이 느슨해지는 건 노화의 몇 안 되는 좋은 점이다. 나이 들어도 여전히 삐딱한, 좋고 싫음이 분명한 나는 자주 부정적이지만 이 부정적인 사고나 태도는 어찌 보면 더 좋은 것을 찾기 위해서이고 더 나은 것을 향한 방향성이라고 믿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거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처럼 하나마나한 맹탕인 말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인지 다정한 사람들이 모인 한 모임에서 감사 일기를 매일 기록하기로 했는데 나는 며칠 못쓰고 말았다. 이렇게 내내 감사만 하니 감사가 정말 감사한 건지 잘 모르겠는 수준에 이르렀고 감사함으로 오는 마음의 평화가 과연 누굴 편안하게 할까 하는 생각으로 불편해졌다. 감사할 수만은 없는 한 개인의 불평분만, 고통과 분노는 온전히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 안에서 나온다. 그러니 감사와 평화만을 이야기하면 구조의 문제를 희석해 버린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늘 감사하는 사람 덕분에 편안한 건 시스템 유지로 이익을 보는 자들이겠지 싶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여전히 삐딱하고 불온한 것이 더 적성에 맞는다.


  그렇더라도 내 심심하고 지루한 삶에 감사하다. 지루하고 심심해서 삐딱하게 유유자적할 수 있는 건 나의 기득권이자 자산인 걸 안다. 내게 상처 준 이들이 상처만 준 것이 아님을 알고 나 역시 상처 줬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생채기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영원한 이어질 관계가 어디 있겠는가. 각자 길을 내며 가다가 서로의 길이 맞닿아 함께 했으니 언젠가 이어져도, 다시 보지 않아도 괜찮다.

 내 발 끝이 향하는 대로 나는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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