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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Sep 19. 2024

새해 첫날 저녁에

낯선 동네, 처음 보는 할머니랑 손잡고 

  오늘은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비슷하리란 생각에 새해가 온다고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다 연말 만난 지인에게 몇 년 전 드로잉 수업에 참여한 지인 소식을 우연히 듣고 새해 모임에 초대를 받았다. 드로잉 수업에 온 지인도, 그의 소식을 알려준 이도 소리와 이미지를 모아 작업하는 예술인들인데 둘은 종종 협업을 하는 모양이었다. 장소는 남산 아래동네 해방촌. 가는 길은 애매하게 멀어서 새해 첫날 한산한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남산타워가 가깝게 보이는 정류장에 내렸다. 


 서울이 눈 아래 펼쳐지는 동네, 지인의 집은 버스 정류장에서 십 여분 남짓인데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낯선 골목을 더듬거리며 간 길을 돌아 나오다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작고 마른 몸에 한 손엔 지팡이, 또 한 손에 작은 가방을 든 할머니. 어둑해지는 가파른 골목길에 엉거주춤 걸음을 멈춘 할머니는 나를 향해 가방 쥔 손을 내밀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계단 오르기가 힘들어 손을 잡아 달라는 것 같았다. 할머니 가방을 받아 쥐고 남은 빈손에 할머니 손을 잡았다. 

 “어디 가세요?” 

 “저기, 저기로 가면 되는데 계단을 못 가”

 “댁에 가시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낯선 할머니 손을 잡고 어색해 이야기라도 걸어 볼 요량으로 질문을 했지만 할머니 목소리는 너무 작고 웅얼거려서 뭐라고 하는지 사실 알아듣지 못했다. 처음 와 보는 동네, 처음 보는 할머니 손을 잡고 나는 새해 첫날 저물 무렵 가파른 길 위에 있었다. 중간중간 ‘이리로 가면 돼요?’하고 물으면 잡은 손을 당기는 걸로 할머니는 대답을 대신했다. 비슷비슷한 빌라와 다세대 주택들이 빽빽한 좁은 골목길에 배달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면 할머니와 나는 길 한 편에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걸었다. 모르는 이가 보며 사이좋은 손녀와 할머니, 아니 모녀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할머니 속도에 나의 속도를 맞추는 사이 해는 져서 어둔 골목길에 드문드문 가로등이 켜졌다. 


 “저기, 저기, 저리로 좀만 가면 돼” 

느릿하고 조심스럽던 할머니 발걸음이 급해졌다. 경사가 밭은 계단 위에 빌라가 할머니가 찾아가는 곳이었다. 빌라 입구에서 내 손을 놓은 할머니는 힘겹게 입구 유리문을 열고 다시 계단을 올랐다. 할머니는 현관 앞에서 비번을 두어 번 틀리고선 겨우 문을 열었다. 기척 없는 실내는 밖처럼 어두웠다. 그 어둠 속으로 할머니가 서둘러 들어가셨다. 밖으로 나와 핸드폰의 지도를 켰다. 지인의 집과 멀어진 건 아닐까 했는데 할머니가 사는 빌라에서 뒤로 도니 거짓말처럼 지인의 집이었다. 마치 인사도 없이 사라진 할머니가 길을 찾아 준 거처럼. 


 늦은 줄 알았는데 손님 중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여전히 수줍었는데 이젠 곁에 연인이 함께 하고 있었다. 손님맞이 빵을 굽고 채식 카레를 만드는 와중에 나와 함께 했던 드로잉 모임의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미완성의 그림들을 손봐서 완성했다며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여주는 모습이 아이 같았다. 채식주의자 식물성의 남자 사람 지인은 이젠 마흔을 훌쩍 넘겨 청년이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들었지만 변함없이 천진하고 맑았다. 손님들은 다들 한 손엔 집에서 만든 음식을 가지고 속속 도착했다. 식탁에 음식이 차려지고 와인도 따르고 건배를 하며 새로운 한 해를 서로 축하했다. 아는 사람과 처음 보는 이가 사이좋게 섞인 자리는 생각보다 편안하고 즐거웠다. 새해가 오든지 말든지 뭔 상관이람 하던 마음은 어디 가고 나는 내내 웃고 있었다. 낯선 동네 처음 보는 할머니와 골목길을 손잡고 걷다가 처음 보는 이들과 저녁을 먹은 새해 첫날 저녁상 지인이 구운 빵에는 ‘옆’과 ‘곁’이라고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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