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고 마는 이들은 다 실패한 것일까?
연말부터 내내 보자고 하던 친구를 봄이 되어서야 만났다. 맑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었다. 친구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동안 마음을 내어 활동하던 작은 모임에서 탈퇴했다고 말했다. 단호한 말투로 그 단호함을 숨기느라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동안 고민이 많았던 것 같았다. 종종 친구가 활동하는 모임의 크고 작은 갈등을 전해 들었는데 어쩌다 그 갈등 사이에 끼여 마음을 많이 다친 거 같았다. 수면유도제를 먹어야 겨우 잠드는 여러 날을 보내면서 상담을 다녀야 하나 생각 중이라고 했다.
“언니가 예전 페미니즘 모임에서 나올 무렵 사람사이에서 힘들 때 뭐 저 정도로 힘들까 했는데 이제 언니가 이해가 돼. 그때 공감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 나는 공감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야?”
나는 소리 내어 웃으며 친구가 판단 없이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했다고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줬다.
친구는 긴 시간 젠더폭력 피해자로 살다가 몇 년 전부터 비슷한 피해경험을 가진 자조 모임에 나가며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재해석하며 더 단단해지는 중이었다. 친구는 삶을 새롭게 정비한 후 시작한 모임에서 버티지 못하고 나온 것이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된 것 같다고,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라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실패는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그러진 관계, 삐걱대는 관계를 언제나 단절로 끝내 버리는 것으론 나를 따라 올 자가 없는데 말이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기 안의 부대낌으로 조직이든 모임이든 결국 떠나고 마는 이들은 다 실패한 것일까? 친구가 떠나온 모임을 지원해주던 한 단체의 대표는 하나의 모임, 조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버티는 힘이 중요하다고, 나무처럼 든든히 버티는 존재가 서로에게 되어주자고 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 더군다나 그 만남과 관계가 모여 집단이 될 땐 평화와 협력만 있진 않을 것이다. 갈등은 언제나 따라오는 상수 값이고 갈등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태도는 각양각색이다. 인권단체의 대표, 활동가가 할 수 있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말이지만 내가 부서질 것 같은데 대의를 위해 나를 갈아 넣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개인의 버팀과 희생으로 유지되는 조직, 모임라면 망해도 된다고 친구에게 말하며 너는 나무가 아니고 지금은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은 성공이라는 화사한 양지에서보다 실패라는 눅눅한 음지에서 더 많이 배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친구는 현재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공부 중인데 친구가 하는 공부에서는 일과 관계,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보단 실패가 더 풍성한 자원이 될 거 같았다.
친구에게 짐짓 지혜로운 왕언니처럼 그럴듯하게 말은 했지만 사실은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다. 관계에서 번번이 비슷한 상황과 이슈 앞에서 고꾸라지는 나는 곁에 다정한 사람 하나 없이 늙어가다 심술 맞은 노인이 될까 지레 걱정하곤 한다. 그러나 보송한 마른자리만 딛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설령 있다 해도 그 삶이 과연 만족스러울지 모르겠다. 곁에 다정한 이들이 많아 보여도 당사자가 아니면 그 속내를 누가 알 것인가. 관계에서도 일에서도 거듭된 실패로 심사가 좀 꼬여있지만 내가 누군가를 쥐뿔만큼이라도 공감하고 헤아린다면 그건 내가 자주 실패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 믿는다.
친구와 나는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오래 걸으며 우리는 조직형 인간이 되긴 힘들다고 언제나 조직은 우리에게 실망만 안겨 준다고 그까짓 조직 우리가 떠난다고 깔깔 웃었다. 친구와 나는 이렇게 종종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며 각자의 계단을 오르고 내릴 것이다. 아직 차가운 봄밤 친구는 내 옷깃을 여며 주었다. 이것만으로 우리의 다정함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