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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한 언니 Oct 17. 2024

밥벌이의 그림자

다들 애쓰며 사는 날들

  오랜만에 공부모임을 다시 시작했다. 좋아하는 여성연구자의 오디오 방송에 소개되는 책과 영화 등을 읽고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다. 같이 하는 이들은 평소 알고 지내는 또래 여성들로 함께 공부하면 생각도 이야기도 풍성해질 거 같았다. 내내 홀로 지내다가 밖으로 나가 나와 지향이 비슷한 이들을 만나니 설레기도 했다. 


 첫 모임에서 거의 일 년 만에 지인을 만났다. 늘 명랑한 지인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동안 구직활동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고 동시에 좀 우울했다고 근황을 전했다. 중학교 도서실에서 일하는 지인은 계약직 사서로 주기적으로 학교를 옮기는데 서울시 사서 모집을 우연히 알게 되어 지원했다고 한다. 정성스럽게 다듬고 고쳐 쓴 지원서로 1차와 2차를 통과하고 면접 예상 질문을 여러 차례 연습하고 3차 면접까지 갔다. 면접 당일 긴장 속에 들어간 면접장 안에는 10분으로 맞춰 둔 알람시계와 면접 질문이 적힌 질문지 파일이 놓여 있었다. 면접관이 직접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6개의 질문이 적힌 질문지를 보고 10분 동안 말하는 면접이었다. 지인은 처음 접하는 면접 방식에 당황했고 입을 여는 순간 망했구나 싶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질문엔 이렇게 답해야 했는데 후회를 하면서 좋은 기회를 날린 자신을 탓했다. 면접장의 젊은 구직자들을 보면서 쉰이라는 나이가 새삼스러웠고 탈락을 확인한 후엔 곧이어 아픈 엄마의 병간호로 한동안 우울한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함께 이야기를 듣던 친구 역시 구직 중이었는데 최근 면접에서 떨어진 이야기를 했다.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기관에 면접을 보러 갔는데 관료적이고 원칙적인 면접관의 질문에 머리가 하얘졌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간 다른 기관에선 50대는 뽑을 생각이 없었는데 현재 일하는 50대 활동가의 성실함과 진심 어린 태도를 좋게 봐서 50대지만 면접을 본다는 말을 들었다. 면접에 불러놓고 50대는 뽑을 생각이 없었다니. 그 말을 들은 친구는 면접 전부터 울컥했는데 이야기를 듣던 같은 50대인 우리들 역시 울컥하고 말았다. 친구는 그동안 피상적이던 구직의 어려움과 밥벌이 시장에서 고단함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거 같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조합원으로 가입한 생협에서 종종 오는 구인 문자를 떠올렸다. 문자를 볼 때마다 이력서를 내볼까 생각한 지 오래되었지만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써야 할지, 이력서엔 어떤 경력을 써야 할지부터 막혀서 매번 포기했다. 창작지원서나 예술 활동 지원서는 자주 썼지만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쓰는 것은 낯설었다. 내가 얼마나 창조적인 사람인지 개성 있는 자기 세계를 가진 예술인인지 쓰는 예술지원서도 어렵지만 평범하지만 유능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는 더욱 높은 산이다. 온갖 종류의 자격증과 그럴듯한 경력과 이력으로 사람을 줄 세우고 평가하는 냉랭하고 야멸찬 세계. 게다가 오십대라는 나이는 사실 그중 가장 높은 산이었다. 


 공부보다 근황을 나누느라 시간을 다 보낸 모임 며칠 뒤, 오래 사용한 인터넷 통신사를 바꾸게 되었다. 십 년 넘게 사용한 장기 가입자인 나는 이용해지를 위해 통신사에 전화를 했다. 전화는 상담원 모두 상담 중이라 연결에만 십여 분이 걸렸고 겨우 통화하게 된 상담원은 해지를 방어하기 위해 간곡하게 나를 설득했다.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데 어린 티가 역력한 목소리의 상담원은 해지할 때 불이익과 계속 가입했을 때의 여러 혜택을 쉼 없이 말했다. 20여분의 실랑이 끝에 결국 상담원은 풀 죽은 목소리로 해지 절차를 밟아줬다. 

 그날 통신사 해지 후 반납해야 할 인터넷 장비를 들고나간 길, 따가운 햇살을 피하느라 뒷골목 그림자 속으로 걸어갔다. 아마도 20대 여성노동자인 전화상담원과 50대 구직의 어려움을 겪는 나와 지인들은 모두 밥벌이 시장의 고단한 동지들이겠지 싶었다. 다들 애쓰며 사는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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