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던 마음도 변해버린 마음도 다 내 마음
해마다 봄이면 꿈이 길고 장황해진다. 매일은 아니지만 꿈 일기를 꽤 오래 쓰고 있는데 봄에 유독 꿈이 수선스러워지는지는 걸 올해야 알아차렸다. 올 봄꿈엔 철산동이 나왔다. 내가 한동안 드나들며 예술 활동을 하던 동네, 정다운 분들을 많이 만난 동네, 그러다 여러 사정으로 멀어진 동네. 이젠 재개발이 시작되었을 철산동에 꿈에 찾아갔다. 오르막을 한동안 올라갔지만 산골짜기 사이 내가 사랑하는 동네는 수몰 지구처럼 맑은 물에 잠겨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동네가 사라지기 전에 오지 못해서 잘 가라는 인사도 못해서 꿈에서도 마음이 오래 먹먹했다. 한동안 죽이 맞아서 어울리던 사람도 언제 그랬냐 싶게 멀어지고 다시없을 사랑이라 여기던 마음도 민망하게 식어버리기도 한다. 좋아하던 마음도 변해버린 마음도 다 내 마음인데 이게 늘 어렵다. 사람도 인연도 떠나간 것을 눈치채지 못해서 자주 마음을 앓는다.
봄꿈에 한동안 마음이 허허롭다가 오래전 알던 지인을 만났다. 좋은 기억도 그렇다고 나쁜 기억도 없는 사람. 지역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활동가이자 작은 시민단체들에 항상 자기 자리가 있는 분이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누구든 환대해 주는 온화한 사람이었는데 그렇다고 그녀와 내가 각별하다거나 마음이 잘 통했던 건 아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였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와 나는 여전하다는 인사치레를 하고 소소한 근황들을 나누며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와 내가 동시에 아는 친구와 함께 셋이서 한강변으로 산책을 갔다. 봄이 물들기 시작하는 강변에는 강아지와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 지인은 한동안 한강에 자주 산책을 나왔는데 갱년기와 함께 찾아온 공황과 우울에 한강의 풍경들이 위로가 되었다고 했다. 당시 힘들다는 소식을 나도 어렴풋하게 전해 듣고 있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정 연령대가 되면 다들 몸도 마음도 소진되어 공황도 찾아오고 우울도 함께 하는가 보다. 거의 매일 한강에 찾아와 강물과 나무를 바라보고 노을에 물드는 하늘 아래서 조용히 스스로를 보듬고 다독였을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와 내가 절친한 사이도 아니고 구구절절 서로의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알 거 같았다. 나도 그 무렵 거의 매일 불광천을 걸어 월드컵 공원에 가 저 멀리 반짝이는 한강변에 늘어선 빌딩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다가 왔다. 하던 습관대로 살고는 있지만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은 몸과 열심히 살아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살림과 보잘것없는 이력에 미래는 저 멀리 불빛처럼 나를 두고 달아나는 거 같았다. 그녀도 나도 저마다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강 이편과 저편에서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중년의 우울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녀와 나를 모두 아는 친구는 우리 이야기를 듣다가 이제 시작되는 몸의 징후들을 이야기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오는 낡아가는 몸의 징후들은 사는 모양은 달라도 비슷해서 우리들은 같이 웃었다.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 내 것을 다 내어줄 거처럼 열렬하지 않아도 서로 못난 구석을 이야기하며 웃는 나이가 된 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라는 걸 그녀들과 나는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어느새 어두워진 강변에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드문드문 켜진 가로등 불빛 아래 젊은 연인들이 봄꽃보다 환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람이 뭐가 아름답냐며 냉소를 날렸는데 이젠 꽃그늘 아래 어린 연인들이 예뻐 보였다. 봄에 돌아오는 꽃처럼 젊음도 마음을 내어준 인연도 돌아오지 않지만 그래도 미세먼지 날리는 하늘 아래 꽃은 피고 젊고 늙은 우리들은 잠시 한때 봄 풍경 속에 어울려 같이 아름답다. 봄밤 산책을 오래 하고 종종 다시 보자고 했지만 아마도 더 오래 있다가 볼 거란 걸 우리들은 잘 안다.
그러면 어떠랴. 오늘 밤이 좋았으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