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해야만 감각되는 것들
내가 지금껏 한 생계노동 중엔 가장 오랫동안 한 일은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일이다. 대략 일곱 살부터 열네다섯 살까지의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그림을 가르쳤다. 아이는 딱 한 시간만 예쁘다지만 한 시간 간격으로 많은 아이들을 동시에 만나다 보면 얼른 수업을 끝내고 교실을 탈출하고 싶을 때가 솔직히 더 많았다. 기본적으로 교육이라는 행위에는 돌봄과 감정노동이 수반된다. 그리고 학교 밖 교육, 제도 밖 교육은 돌봄과 감정노동이 더욱 강화된다. 내가 좋은 미술 쌤이었는지는 자신 없고 교육과 돌봄이 혼재된 이 노동이 얼마나 전문적인 일로 취급받는지도 모르겠지만 임금에서만은 기준도, 규칙도, 존중도 없는 낙후한 세계라는 건 분명했다.
1999년 방과 후 강사 일을 시작했다. 십 년을 꽉 채워서 했는데 ‘학교’라는 조직은 내가 학생일 때와는 다른 행태로 관료적인 곳이었다. 인터넷 발급이란 게 생소하던 시절, 학교가 강사청탁을 하며 내게 요구한 서류들은 공무원 채용기준에 준하는 것들이었다. 부랴부랴 건강검진 서류를 만들고 졸업 증명서를 발급받고 집 어디에 처박혔는지 모를 졸업장을 찾아 카피를 해갔다. 그렇게 방과 후 강사가 되니 계약서를 매분기 다시 작성했는데 이 년 정도 지나니 통상적인 계약서 외에 계약서가 한 장 더 생겼다.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 계약서엔 터무니없는 조항들이 있었다. 그중엔 임신을 하면 그만둔다는 조항도 있었다. 방과 후 강사 중 한 분이 임신초기 수업을 하던 중 하혈을 하며 쓰러져 구급차가 온 적이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학교는 개인의 불행을 귀찮은 사고로 여기며 비공식 계약서를 만들었다. 채용은 학교가, 정확히는 학교장이 하지만 방과 후 수업에 관한 모든 문제와 사고의 책임은 강사에게 있었고 얄팍한 강사료에서 매달 일정 금액을 운영비로 차감했다. 공무원 품위유지에 관한 계약조항도 있었는데 학교에서 일하는 동료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품위와 존중도 학교는 보여주지 않았다. 내 급여 통장에 강사료를 터무니없이 불려 학교 비자금을 만든 것을 알게 된 후, 문제를 제기하자 학교는 다음 해 더 이상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실제로 입금은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열 배로 불린 급여가 내 통장내역에 남는 건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학교 비정규직 노조도 생기고 방과 후 강사 노조도 만들어져 이런 일들은 심각한 민원감이라고 학교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지인이 알려주었다. 작년엔 코로나로 일 년 내내 방과 후 수업이 열리지 않았다. 국가적 재난 앞에 방과 후 강사의 수입이 제로가 되어도 국가도 학교도 대책은 없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의 가장 마지막 형태는 방문미술교사였다. 온갖 업체가 횡행했지만 수업 내용은 대동소이해 보였다. 서글픈 이 사회의 예술교육, 아니 예술교육시장이었다. 인터넷 구직란에 간단한 이력을 올려두니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집과 가장 가까운 곳에 면접을 보고 일을 시작했다. 36개월부터 중학생까지 가르치는데 40분, 또는 60분 수업 시간에 따라 수업료가 달라졌다. 수업재료는 선생인 내가 들고 다녀야 하고 한 번에 한 아이만 수업했다. 방문미술업체에게 꽤 많은 보증금을 내고 지역의 영업권을 가진 지사장이 강사들을 모집하여 운영되는 시스템이었다. 한 아이가 내는 수업료는 결코 적지 않았지만 집집마다 방문하여 상담하고 수업하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액수는 4할 정도였다. 그 나머지 6할이 넘는 금액은 지사장과 업체가 가져갔다. 이 일을 오래 하면 오래 할수록 강사료가 올라간다고 하지만 지사장도 이익을 남기기 어려운 구조였고 업체만 수익이 창출되는 구조라는 건 누구라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는 이들은 40대 중반 넘겨 더 이상 강사 일을 구하기 어려운 중하층의 중년여성들이었다. 구직이 쉬운 2,30대 교사들이 자주 그만두는 바람에 지사장은 일이 절실한 40대 이후 여성을 더 선호했다. 자기 차에 각종 미술재료를 싣고 오후 시간 내내 수업을 해도 이동거리가 있기 때문에 하루 다섯 번 이상 수업을 하긴 힘들고 차가 없는 나의 경우 세 번 이상 수업은 무리였다.
경험을 해야지만 감각되는 것들이 있다. 이 감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했다. 방문미술교사를 하는 동안 나는, 나와 같은 일을 하는 학습지 교사들과 깨끗한 공중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알아차리는 눈이 생겼다. 수수한 옷차림에 굽이 낮은 신을 신고 캐릭터 스티커가 붙은 서류 파일들을 들고 다니는 중년여성들은 대개는 학습지 교사들이었다. 이동 중 빠르고 저렴한 가격으로 식사를 해결해야 해서 김밥이 가장 맞춤한 식사였는데 종종 김밥천국에서 혼자 김밥을 먹는 중년 여성들을 보면 혹시 방문학습지 교사일까 생각하곤 한다. 그리고 수업하는 집의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어서 대부분 여성인 방문교사들은 생리 중 처리를 괴로워했고 방광염을 달고 살았다. 이 일을 그만둔 후에도 나는 가스검침원, 인터넷 설치기사, 택배 기사, 각종 전자회사의 사후 서비스 노동자들의 화장실 처리를 생각하곤 한다.
- 아는 여자의 노동이력 3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