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며 분투하는 서글픔은 나의 힘
내가 어떤 노동을 했는지 돌아보는 글을 두 회 차 썼다. 인쇄되어 나온 글을 보니 별 고생 없이 나른하게 살아놓고 힘든 일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떤 것 같아 면구스러웠다. 그러다가 몇 년 전 페미니즘 공부모임을 할 때 느끼던 씁쓸함이 떠올랐다.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인 공부모임의 여성들은 친절하고 선량했다. 그녀들과 여성으로서의 삶과 일상을 수다로 풀어내고 까부는 건 무척 유쾌했다. 그 즐거움 사이사이 그들과 나는 서 있는 위치가 다르구나, 종종 느꼈는데 한 번은 여행이 수다의 주제가 되었다. 여권도 운전면허도 없다는 내 이야기에 한 동료가 눈이 커졌다. 아직도 해외에 나가보지 않았냐, 운전을 하면 삶의 영역과 질이 달라진다고 말했다. 여권과 운전면허가 없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지가 더 놀라웠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고루 섞인 모임의 여성들은 가깝게는 일본과 대만, 멀리는 유럽으로 연차를 쓰며 여행을 다녔다. 더러는 직장을 옮기는 사이 퇴직금으로 한 달 이상 평소 동경하던 도시와 도시로 긴 여행을 다녀왔다. 임노동을 하지 않는 기혼 여성들도 종종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그녀들이 여행에서 돌아오면 모임 이후까지 풍성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낮 시간 수원의 대학 부설기관에서, 또는 옹색한 사설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시달리다 온 나는 근사하고 자유로운 그녀들의 여행 이야기가 좀 피곤했다.
올 초에 ‘여자와 여행’이라는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참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난 이 프로젝트의 의도를 물리적으로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코로나 팬데믹 시대의 좀 다른 여행으로 상상했었다. 그런데 모인 이들은 해외여행 자유화를 이십 대에 맞이한 배낭여행 1세대들이었다. 줌으로 진행한 사전모임에서 김포공항에서 떠나던 첫 해외여행의 추억을 주고받으며 다들 즐겁게 아련해하는 걸 보고 마음을 접었다. 최근엔 남미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남미도예에 반해 인생과 직업이 바뀐 도예가의 수업을 줌으로 듣는다. 사실 남미도 도예도 관심이 없었지만 줌으로 실기강좌가 가능할지 궁금해서 들었다. 역시 줌으로 하는 예체능 실기 강좌는, 그것도 종이에 그리는 드로잉이 아닌 입체작업은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데 이 강좌를 듣는 이들은 도예작업보다 한국에서 가장 먼 대륙, 남미 여행의 후일담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강좌를 이끄는 선생님도 수강자도 낯설고 매혹적인 이국으로의 여행과 문화에 더 집중했다.
여자들의 여행은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한국적 가부장 사회를 떠나는 독립과 성장의 서사로 상징될 때가 많다.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 필수처럼 말이다. 여자의 여행을 독려하고 지지하는 책도 많으며 여행을 새로운 세상을 향한 도전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동료 여성들의 여행 경험을 들을 때 올라오던 편치 않던 감정은 무엇일까, 열등감일까, 못난 피해의식일까, 어디라도 멀리 가려면 대중교통은 있는지, 차편의 시간과 거리를 검색하며 교통비를 따지는 나는 인색하고 쩨쩨한 여성인 건가. 그녀들이 답답한 남성 중심 사회를 정기적으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의 기득권을 여성이라는 젠더로 쉽게 삭제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는 속 좁은 안티 페미니스트 꼰대인 걸까.
중간중간 쉬어가는 틈이 있긴 했지만 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예술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으니 이렇게 저렇게 일을 찾아다녔다. 한 번은 비슷한 일을 하는 동료 작가가 생계노동을 구하러 다니는 나에게 그렇게까지 해서 꼭 돈을 벌어야 하냐고 물었다. 질문을 하는 그녀는 당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고 굳이 자신이 집안의 경제를 책임질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일을 했을 것이고, 여행 이야기를 즐겁게 들려주던 모임의 여성들도 일을 해서 경비를 마련했을 텐데 자신의 노동과 일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성차별적인 에피소드들을 나누었지만 그뿐이었다. 여성 사이에 당연히 존재하는 다양한 차이들, 그 차이들이 불러오는 소외나 차별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류의 세계, 권력의 중앙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각종 성차별엔 쉽게 분노하지만 늘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후미진 변방에서 일하는 여자의 이야기에는 무심해 보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나는 시각예술 작가이지만 동시에 예술과 관련한 일, 관련 없는 일을 오가는 일하는 노동자이고 제도 밖 문화예술 강사이다. 나에게 밥이 되어 준 노동은 연차를 더해가지만 시장에서의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다. 해를 거듭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물가상승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은 화가 나다가 결국에는 서글퍼진다, 내가 낡고 쓸모없는 인간 같아서, 나의 노동이 하대 받아서. 그런데 이 경험이 모이고 쌓여서 나라는 한 사람, 한 여성, 창작자의 이력을 만들었을 것이다. 씁쓸하고 서글프고 부당한 내 경험의 근원을 살피며 세상에 띄우는 질문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 질문에 더듬더듬 답을 찾아다니며 중년여자가 되었다. 질문의 답은 늘 매끈하지 않았고 정확하지 않았지만 내가 조금이라도 나은 예술가, 창작자라면 그건 밥 버는 노동의 경험 때문이다. 떠나는 자유의 쾌감보다 머물며 분투하는 서글픔은 나의 힘이다.